이하 글은 Gregory Flaxman의 The Brain Is the Screen: Deleuze and the Philosophy of Cinema (2000)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들뢰즈 철학에 대한 Flaxman의 해석을 따르고 있으며 제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하는 1-23쪽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들뢰즈는 각각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란 테마로 83년 85년에 시네마라는 두 권의 책을 출판한다. 이는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이 지배하던 당대의 지적 풍토에서 벗어나 새로운 철학적 지형을 제시했다. 들뢰즈는 “사물의 본질은 결코 처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확실해지는 발전의 중간 과정에서 나타난다 (Deleuze [1983] 1986: 3)” 고 보았으며, 이 안에서 철학은 개념을 직접 창조하고 발명하는 ’구성주의’적 활동으로 예술 또한 감각과 정동을 생성하는 독자적인 사유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철학자가 개념을 생성하듯 예술가는 감각과 정동을 생성한다. 다만 각 예술 활동은 다른 블록(block)을 통해 이러한 감각과 정동을 생성하는데 그림이 선과 색으로 감각과 정동을 만들어낸다면 영화는 ’운동과 시간의 블록’을 통해 사유를 촉발하며, 이는 푸코의 표현을 비틀어 말하자면 “비파시즘적 사유로의 입문”을 구성하려는 야심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물의 본질도 결코 처음부터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직 중간에, 그 발전의 과정 속에서 그 힘이 확실해질 때 비로소 드러난다 (Deleuze [1983] 1986: 3).
들뢰즈가 예술적 감각에 대해 집중적으로 투자한 것은 이 두권의 영화 책이 처음은 아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1964] 2000: 1) 에서 그는 "예술 작품은 단지 해석하거나 해석될 기호를 방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결정 가능한 절차에 따라 기호를 생산한다"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 ([1994] 1994)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을 참고하듯, 그는 마치 아침에 눈을 뜨고 눈을 뜸과 함께 지각이 시작되고 이미지들의 현존 속에 있는 감각들에 대해 여행한다. 이러한 소용돌이는 그가 정의한 운동-이미지다. 들뢰즈의 설명을 따르면, “운동-이미지는 대상이다. 연속적 기능으로서 운동 속에 포착된 사물 자체다. 운동-이미지는 대상 자체의 변조다.” 따라서 눈을 뜬다는 것은 운동하는 이미지들의 소용돌이를 만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에 더해 그는 “이미지 = 물질 = 운동 = 지각”인 이 비인간적이며 철학 이전적인 환경을 내재성의 평면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이때 내재성의 평면은 이미지가 놓이는 바탕이 된다. 주체와 객체, 물질과 지각이 아직 단단히 갈라지기 전의 장을 가리키며, 이미지가 단지 시각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건, 변형, 관계의 흐름이 함께 포함되면서 이미지가 더 넓은 감각적 현실로 확장되고, 이미지와 사유는 그가 “내재성의 평면”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합쳐진다. 그것은 초월론적이며, 전개체적이고, 심지어 철학 이전적인 무한한 변주의 장이다. 이 내재성의 평면은 가상적 평면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비현실적이거나 상상적이거나, 혹은 가능성의 장 같은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평면이 비물체적인 것들(사건들,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으로 말한다. 그것들은 “가능성의 조건”(가능성, 곧 가능성의 미학적 창조가 내재성의 평면의 핵심에 놓여 있다)이 아니라, 가능성들이 생성되는 유전적 조건들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정상적인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는 평면으로 가는 하나의 ’경로’를 예고하며, 철학의 고전적 좌표들을 탈영토화하는 방식으로 철학과 공명한다.
그렇다면 들뢰즈에게 이미지란 무엇인가? 들뢰즈는 문학, 회화, 그리고 특히 영화를 향해 “외부로부터의 사유”라고 말한다. 오늘날처럼 조직된 클리셰가 개념적 반사신경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조건 속에서, 세상은 하나의 아비투스(habitus)이자 규칙성과 통제의 양식으로 작동한다. 상식이란 초월성, 총체화, 그리고 유기체성이라는 가정에 이르려는 개념들의 조정에 다름 아니며, 들뢰즈는 움직임 속에서 사유의 본질인 우연과 즉흥으로부터 우리를 차단해 버리는 것에 반해, 탈영토화시키고 정동적이며 실효적인 예술적 이미지로 고개를 돌린다. 들뢰즈가 말하는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 그림이나 대상을 대신하는 표상이 아니다. 베르그송을 따라 세계 자체가 이미지들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우리가 눈을 뜨는 순간 마주치는 것은 고정된 사물들의 목록이 아니라 서로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흐름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이미지의 기본 성질은 정지보다 운동이며, 형태보다 변형으로 이루어진다. 재현은 보통 “원본이 있고, 그걸 대신하는 표상이 있다”는 구조를 전제하는데 들뢰즈의 이미지는 그 구조를 약화시킨다. 이미지가 무엇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 자체가 세계의 한 국면으로서 작동한다. 그래서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보다 “이미지가 무엇을 하는가, 무엇과 어떻게 연결되는가”가 더 중요해진다. 이 관점에서 이미지는 원본을 닮아야 한다는 재현의 규칙에서 벗어난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아니라, 이미지가 무엇을 하느냐로, 이미지가 어떤 연결을 만들고 어떤 변화를 일으키며 어떤 경로로 사유와 몸을 움직이게 하는지가 핵심이 된다. 들뢰즈에게 있어 모든 예술은 사유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일종의 운동-이미지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자동적 운동(automatic movement)’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위상을 점한다.
서양 철학사에서 시간은 오랫동안 공간이나 영원한 이데아에 종속되어 왔으나, 칸트에 이르러 시간은 변화하는 모든 것의 형식이자 내부성의 순수 형식으로 격상되었다 (Deleuze 1984, viii). 이러한 들뢰즈의 분석은 칸트의 비판철학 (1984)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으며,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로 대표되는 ’운동-이미지’는 이러한 시간을 공간 속의 합리적 연결, 즉 아리스토텔레스적 서사 구조와 결합된다. 이는 인간의 신경망이 자극을 행동으로 연결하는 “감각운동 도식(sensory-motor schema)”에 기초한 것으로, 이 도식은 세계가 합리적이고 인과적이라는 믿음, 즉 라이프니츠 식의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는 확신에 의해 지탱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현대의 잔혹극을 겪으며, 우리는 더 이상 이 세계의 합리성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해 감각운동 도식은 붕괴하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무위(inaction), 기다림, 그리고 “어떤 공간들(any-spaces-whatever)”이 출현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움직임, 즉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의 전환 속에서 그는 영화가 무엇인지, 다른 예술들과 어떻게 다른지, 사유에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그리고 영화의 이미지들이 어떤 방식으로 구별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 속으로 다시 영화를 되돌려 놓는다. 최근 몇 년 사이 영화이론은 대체로 지하로 숨어들었으며, 그 자리를 대신해서 역사주의, 관객 연구, 문화연구, 인지주의가 학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재현의 체계로 이해되고 여러 관습들이 먼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 이미지를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체계로 영화가 파악되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가 보기에 진정으로 독창적인 사유는 “그 자신의 순간, 계기와 정황, 풍경과 인물, 조건과 미지수들을 결정한다 (Deleuze et al. [1991] 1994: 2).”(1) 그리고 이러한 사유는 움직임 속에서, 특히 그 중간에서, 클리쉐로 변환이 시작되었지만 완료되지 않은 그 중심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시간-이미지는 더 이상 시간을 동작이나 사건의 결과로서 간접적으로 보여주던 방식에서 벗어난다. 대신, 시간을 있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새로운 이미지와 몽타주의 논리를 확립한다. 마치 우리가 흘러가는 시간을 물리적으로 체감하듯, 시간 자체가 이미지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이미지와 사유는 들뢰즈가 내재성의 평면이라 부르는 곳에서 하나로 융합된다. 이곳은 고정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있는 잠재적 사건들과 에너지(특이성)들로 들끓는장소로, 바로 여기서 영화는 단순히 대상을 찍는 것을 넘어, 철학자처럼 “개념을-만드는 것(making cinematic)”(Nancy [1996] 1996: 110)이 된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정상적이고 습관적인 지각의 한계를 넘어, 굳어진 사고의 영토를 벗어나게 하는(탈영토화) 새로운 경로를 열게 된다. 여기서 들뢰즈는 ‘이미지’의 정의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변형시킨다. 그에게 예술적 이미지란 대상을 본뜬 사본이 아니라, ’감각의 집합’ 그 자체다. 예술은 이러한 날것의 감각을 생산해내는 기계와 같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건 사과다”, “저건 책상이다”라고 즉각 알아보는 상식적인 인식의 회로가 작동할 때, 예술적 감각은 이 회로를 일시적으로 합선시켜버린다. 따라서 이미지가 기호가 된다는 말은,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편안하게 재확인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의 충격으로 다가와, 우리의 뇌를 뒤흔들고 억지로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강제하는 덩어리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의 잠재성에도 불구하고, 운동-이미지의 체계는 혼돈의 역동성에 함께하기보다는 혼돈 위에 질서를 접붙이려 한다. 이는 더 넓은 인간 진화의 궤적으로 전치될 수 있으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뇌는 스크린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선 인간의 뇌는 추출을 한다. 뇌의 추출은 일종의 감산으로 기울어지는데, 살아 있는 것은 자기에게 관심 있는 것만 지각하고 나머지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이미지=물질=운동”인 무한한 빛의 흐름이며, 여기서 물질과 지각 사이에는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오직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한다 (1988: 23). 인간의 뇌는 세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를 위해 존재하며 (Deleuze [1988] 1993: 25), 우주 속 무한한 이미지의 흐름(혼돈) 속에서 생존에 필요한 것만을 선택하고 걸러내는 “스크린”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더 정확히는 반응을 위해 준비하는 간격 안에서 뇌는 “그 요소들을 선택하고, 조직하거나, 그것들을 새로운 운동 속에 통합할 수 있도록 (Deleuze [1983] 1986: 62)” 해준다. 따라서 뇌가 세계 밖에서 이미지를 바라보는 중심이 아니라, 이미지의 흐름 속에 생겨난 간격과 지연으로 이해된다. 이 간격이 세계의 범람을 잠시 붙잡고 일부를 선택하고 조직하고, 뇌는 재현을 비추는 판이 아니라 혼돈에서 어떤 관계를 걸러내는 필터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 필터링은 대개 감각운동 도식으로 굳어지는데, 이미지를 지각하고 짧은 정동을 거쳐 행동으로 이어지는 회로가 습관적으로 작동하며, 이미지가 익숙한 길로 정리된다. 들뢰즈가 교조적 사유의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규범화의 결과다. 만남이 곧 인식으로 환원되고, 인식이 곧 반응으로 닫히는 방식이다. 운동-이미지는 이 감각운동 도식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영화적 체계, 지각, 정동,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시간은 주로 변화하는 공간을 통해 간접적으로 주어진다.
관계들의 전체를 거대한 하나의 집합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여기와 이어진다. 관계는 각 항의 내부 성질이 아니라 항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전체를 모든 것을 담는 닫힌 상자로 만들 수 없다. 전체는 오히려 모든 집합을 관통하며 계속 새로 연결되는 열린 바깥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전체는 총합이 아니라 실처럼 모든 집합을 꿰는 개방성이다. 시간-이미지는 이 회로가 흔들릴 때 나타나며,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간격이 커지고 시간 자체가 이미지로 떠오르게 된다. 이때 사유는 기억과 미래 같은 바깥을 향해 열리게 되며, 총체화의 습관이 약해진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가 끊임없이 소비되고 클리셰로 환원되는 “이미지의 문명” 속에 살고 있으나 (Deleuze [1985] 1989: 21), 예술적 영화는 이러한 감각운동 도식의 습관적 통제를 뚫고 나간다. 감각운동 도식의 붕괴 이후 등장한 현대 영화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허물고, 베르토프가 보여준 것처럼 카메라의 “비인간적” 지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이때 영화는 사유에 충격을 가해 신경계를 직접 건드리는 “정신적 자동기계(spiritual automaton)”가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지각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미분적 지점, 즉 사유의 새로운 발생적 가능성에 도달하게 된다 (Deleuze [1983] 1986, xiv).
정리하면 들뢰즈의 이미지 개념은 언제나 양면적이다. 이미지는 감각운동 도식 아래에서 상식을 강화하고 서사를 정상화할 수도 있고, 감각과 몽타주를 통해 그 정상화를 흔들어 사유를 열어젖힐 수도 있다. 이러한 형태는 그가 프란시스 베이컨을 통해서도 이미 보여주었듯이 카오스와 질서 사이에서의 흔들림을 만들어낸다. 영화는 바로 이러한 운동과 시간 사이에서의 흔들림 혹은 긴장 속에서 이미지가 사유를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가로막는지를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장으로 나타난다.
References
- Deleuze, Gilles ([1964] 2000), Proust and Signs: The Complete Text, London: Athlone Press.
- Deleuze, Gilles ([1983] 1986), Cinema 1: The Movement-Imag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 Deleuze, Gilles ([1985] 1989), Cinema 2: The Time Image, London: Athlone.
- Deleuze, Gilles ([1988] 1993), The Fold: Leibniz and the Baroque, London: The Athlone Press.
- Deleuze, Gilles and Guattari, Félix ([1991] 1994), What Is Philosoph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 Deleuze, Gilles (1984), Kant’s Critical Philosophy: The Doctrine of the Facultie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 Deleuze, Gilles (1988), Bergsonism, New York: Zone Books.
- Nancy, Jean-Luc ([1996] 1996), ‘The Deleuzian Fold of Thought’, Oxford ; Cambridge, Mass: Blackwell, pp. 107–13.
- Polan, Dana ([1994] 1994), ‘Francis Bacon: The Logic of Sensation’, in C. V. Boundas and D. Polan (eds), Gilles Deleuze and the Theater of Philosophy, New York: Routledge, pp. 229–54.
(1) 원문: determine[s] its moment, its occasion and circumstances, its landscapes and personae, its conditions and unknowns (Deleuze et al. [1991] 199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