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글은 Gregory Flaxman의 The Brain Is the Screen: Deleuze and the Philosophy of Cinema (2000)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들뢰즈 철학에 대한 Flaxman의 해석을 따르고 있으며 제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들뢰즈와 이미지 (1)와 이어집니다.
가장 먼저, 들뢰즈의 영화 책들은 과연 어떠한 책들이냐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넘어가야할 것이다. 들뢰즈의 영화 책이 어려운 지점은 이 책이 영화의 역사가 아님을 명백하게 도발하면서 시작한다는 데 있다.
“이 연구는 영화의 역사가 아니다 (Deleuze [1983] 1986, xiv).”
이 선언은 영화에 대해 말하는 방식 혹은 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려는 도발이다. 들뢰즈가 겨냥하는 것은 연대기적 배열이나 기원과 결말의 확정이 아니라, 영화적 이미지들이 어떤 방식으로 변형되고 갈라지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내는가라는 문제다. 그래서 그의 영화 책들은 영화의 역사라기보다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에 대한 시도이며, 그 분류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영화의 생성과 함께 갱신되는 지도로 만들어진다. 로도윅에 따르면 들뢰즈가 말하는 역사는 특정한 의미를 가진다.[1] 들뢰즈는 역사를 기원들을 확정하고 결말을 예견하는 작업, 이를 통해 연대기적 연속(시간 순으로 배열된 서열)을 만드는 작업을 비판한다.
“이 모델은 역사를 하나의 유기적 과정, 곧 이야기로서의 역사(histoire)로 조직하는데, 그 자연화된 서술은 헤겔적 필연성의 뉘앙스를 띱니다. 다시 말해 역사는 정신(Geist)의 전형적 운동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24).”
들뢰즈는 또한 그의 철학적 여행 안에서 범주화를 즐겼는데, 이는 개념 창조의 예비 단계로서, 영화학에서 주로 다루는 범주와 그가 만들어낸 것은 다르게 나타난다. 그가 접근하는 자신의 “역사” 개념은 자연사라는 모델로 돌아간다. 이는 분류 체계나 분류학에서 발생하는 역사이며, 이때 분류는 “증상학적(symptomatologically)”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영화의 자연사는 동물 분류처럼 특성들이 특정한 기호의 유형학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이는 본질이나 기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개연성이 낮아 보이는 연결과 보이지 않던 경향을 끌어올리는 특이성들을 선택하는 하나의 창조적 과정, 즉 지도를 생산하는 과정으로 작동하게 된다. 그는 영화학의 전통적 범주를 그대로 따르기보다, 영화적 이미지들 자체에서 솟아나는 범주로 다시 조직하려 한다. 이 재조직은 『시간-이미지』([1989] 2001)에서 크리스티앙 메츠의 ‘대 통합체’가 전제한 언어학적 틀을 흔드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메츠는 영화를 랑그(언어 체계)와 같고 쇼트를 발화와 같다고 보며 ’대 통합체(grande syntagmatique)’를 제시한다. 그러나 들뢰즈에게는 영화가 기호를 만들어내는 한, 그는 자신의 영화 책을 기호의 논리로 이해했다. 이는 곧 “분류학, 즉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에 대한 시도 (Deleuze [1983] 1986, xiv)”였으며, 그에게 있어서
“서부극, 범죄물, 시대극, 코미디 등과 같은 주요 장르들은 이미지의 다양한 유형이나 그 내재적 특성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Deleuze 1995: 46).”
그의 분류 체계는 그가 추적해 온 존재론적 공식, 즉 이미지, 물질, 운동, 지각의 동일성을 정확하게 고수하고, 이를 위해 그의 영화 책들에서 베르그송이 제시한 이미지의 여러 변종을 보완하고자 찰스 샌더스 퍼스의 “대단히 풍부한 기호 분류”를 끌어온다.[2] 퍼스의 분류는 실재에 대한 기술적 과학(descriptive science of reality)으로서, 퍼스의 기호들은 어떤 상위 체계나 메타언어로부터 차출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양태들이거나 감각적인 집합체들이지만, 들뢰즈가 퍼스가 기호 구조의 삼분법적, 이미지, 이미지를 기술하는 기호, 그리고 기호의 해석항인 제3의 이미지로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그 논리는 베르그송의 전제, 곧 정신과 물질이 같은 평면 위에 존재하며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다는 전제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이미지들이 기호적 물질(matière signalétique), 곧 “가소적인 덩어리, 비-의미작용적이고 비-통사론적인 물질 (Deleuze [1985] 1989: 29)”로 이루어져 있고 기호들이 그로부터 구성된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즉, 발화가 아닌 ‘발화 가능한 것’, 기호화 이전의 물질을 제공하고, 기호에 내재한 것은 그것의 “생성적이며 구성적인(genetic and compositional)” 성격이다. 다시 말해, 기호들은 분류학을 낳지만, 그 분류학은 분류되는 것에 앞서 존재하지도 않고, 다른 종류의 체계에서 그것에 접근하지도 않으며, 마지막으로 그것을 총체화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들뢰즈의 영화 범주는 영화 자체의 변조들과 함께 전개된다. 들뢰즈가 영화의 “본질”을 말할 때 겉으로는 영원하고 고정된 존재론을 암시하는 듯 보이지만, 영화 책들은 그 본질이 “운동과 시간의 모험 (Deleuze [1985] 1989, xiii)”임을 확인한다.
“들뢰즈의 분류 체계는 더 넓은 의미에서의 영화적 ’되어감(becoming)’과 분리될 수 없다.”
기호들이 시공간의 블록들(이미지들)로부터 내재적으로 발생하듯, 들뢰즈의 분류 체계 역시 영화적 생성과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만들어간다는 지도는 어떠한 지도일까? 자연사로서의 분류학은 영화의 변화들을 어떤 외부의 이야기로 설명하기보다, 이미지가 스스로 드러내는 차이와 변조를 따라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지도는 장르나 서사보다 먼저, 보이는 것과 말해지는 것의 배치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묻는 자리로 이동한다. 다시 말해 가시적인 것과 발화 가능한 것의 관계가 어떤 조건 아래에서 정렬되고, 어떤 순간에 어긋나는지, 그 배치 자체가 문제가 된다. 이 지점에서 푸코의 분석은, 이 관계가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조건과 권력의 장치가 얽히는 구성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들뢰즈가 세우는 영화의 분류학은 이미지들을, 혹은 아주 간단히 말해 ’빛’을 분류하는 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운동-이미지』에서 그는 내재성의 평면이 빛의 평면이라고 설명하며 이 빛을 조명에 가까운 의미로 말하곤 하지만, 이는 훨씬 더 크고 어려운 ’가시적인 것(the visible)’의 문제로 나타난다. 이 가시적인 것은 푸코가 발전시킨 ’보일 수 있는 것(seeable)’으로, 들뢰즈는 푸코가 독특한 신칸트주의를 정식화했다고 평가한다. 푸코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2007)에서 나타난 오성/감성, 규정/수용의 구도를 시청각적 아카이브로 옮겨 놓고, 이 두 공간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고 배치되는가에 관심을 두는데, 이는 각 방을 “수많은 작은 극장들”처럼 관찰할 수 있게 하는 감옥인 파놉티콘으로 연결되며, 그 안에서 “각 배우는 혼자이며, 완전히 개별화되고, 끊임없이 가시적 (Foucault [1975] 1995: 200)”인 것이 된다.
푸코는 무엇보다도 발화 가능한 것(sayable)이 가시적인 것(seeable)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기술하는데, 여기에서 푸코와 들뢰즈의 차이점이 나타난다.
“들뢰즈가 이끌어내듯, 푸코의 기획은 진리를 ’보이는 것’이 ’말해지는 것’에 의해 규정되는 사건으로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그 과정이 두 영역의 겉보기 구성을 산출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리의 빛’은 빛이 어떤 장치(dispositif) 안에 포획되었을 때, 권력의 그리드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 결과로 만들어진 재현이 마치 적합한 것처럼 보이게 될 때 출현합니다 (Deleuze [1986] 1988: 159–68).”
들뢰즈에 따르면 “영화는 발화 가능한 것과 가시적인 것 사이의 변동하는 관계를 포착할 수 있는 매체를 제공”한다. 전통적으로 이 관계는 도식주의의 지배를 받아 왔지만, 들뢰즈는 가시적인 것에 초점을 둔다. 푸코가 ’발화 가능한 것’을 강조했던 것과 달리 들뢰즈는 ’가시적인 것’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차이는 시대의 변화와 새로운 권력 관계를 말할 수 이다 (그리고 이후에 들뢰즈는 “규율”의 시대를 뒤로하고 통제의 시대를 이야기한다, 25).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청각 문화가 번성한 것은 새로운 에피스테메의 출현과 맞물린다 (『통제 사회에 대한 추신』 (1995)). 영화는 가시적인 것과 발화 가능한 것 사이의 단절을 증식시키고 엄격한 규정으로부터 벗어나는 한 종류의 사유를 한다.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단절이 가장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는 사례들이 영화에서 발견된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예컨대 슈트라우브, 지버베르크,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업에서 목소리는 한편으로 장소가 없는 이야기이자 역사로서 출현합니다. 다시 말해 이미지가 없는 이야기이자 역사입니다. 반면 가시적인 요소는 다른 한편으로 이야기이자 (즉, 사운드 이미지가 없는) 역사가 없는 빈 장소를 제시합니다 ([1986] 1988: 64–5).”
이러한 단절은 운동-이미지의 연속성, 더 나아가 목적론적 연속성 자체를 교란하는데, 발화는 더 이상 가시적인 것을 규정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보이는 것을 설명하기에도 충분하지 않다. 발화와 가시적인 것은 단절되며, 들뢰즈는 새로운 통제의 힘들이 필연적으로 이러한 단절을 이용하여 거대한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수많은 시선을 삼켜버리는 죽은 공간들을 만들어낼 것임을 기꺼이 인정한다. 정리하면, 운동 이미지는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보일 수 있는 것을 감각운동 도식에 따라 규정적으로 배열하는 체제이다. 여기에서 이미지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연쇄를 만들고, 시간은 인과적 계승의 형태로 조직되기 쉽다. 이와 달리 시간 이미지는 두 영역이 완전히 맞물리는 순간을 지연시키고, 그 불일치 자체를 통해 진리의 조건을 흔드는 체제이다. 이 체제에서는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보일 수 있는 것이 정확히 배치되는 일이 거의 없으며, 바로 그 틈이 사유의 공간으로 남는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진리란 강제된 합치에서 생겨나며, 경직된 지정이 지식을 ’수행’하게 만드는 힘을 통해 우리가 믿음을 투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 조건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들이 떠맡았던 부담, 문자 그대로 세계의 무게(진보, 행복, 계몽에 대한 보증)가 어느 순간 도덕적 파탄의 지점에서 (여기서는 WWII가 예시된다), 선의를 박탈당한 세계와 대면해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서 발화(약속)는 더 이상 여론을 움직이기에 충분하지 않았고, 우리가 ’낡은 세계’를 믿게 만들기에도 충분하지 않다 (26). 따라서 들뢰즈는 말한다.
“우리는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참되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델로서, 혹은 이념으로서의 진리는 두 체제 중 오직 하나(즉, 첫 번째인 낡은 체제)와만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Deleuze 1995: 67).”
그렇다면 이러한 두 체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들뢰즈는 이 두 체제를 각각 유기적(organic), 결정체적(crystalline)이라고 부른다. 이는 보링거가 분석한 오래전에 예술에서 “고전적 유기적 체제”와 “비유기적 또는 결정체적 체제” 사이의 대립에서 끌어왔으며, 후자는 첫 번째 못지않게 생동하지만, 강력한 비유기적이고 야만적이거나 고딕적인 삶을 지닌 체제로 설명된다. 들뢰즈의 구분은 고전 영화와 모던 영화의 구분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단순히 역사적 구분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이 체제들은 형식들이 만들어져 나오는 조건들, 형식들이 유래하는 역사적 분할들 자체를 가리키며, 그 체계 안에서 역사를 조건짓는 통념들이 수정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안드라스 발린트 코박스(Andras Balint Kovacs)는 그의 저서 『사유의 영화사(The Film History of Thought)』에서 보링거의 범주가 사실 심리학적이라고 지적하며 이를 들뢰즈 프로젝트의 윤곽에서 발견합니다.
“우선 영화적 이미지는 ‘그것이 조건짓는 것에 대해 권리상으로 선행하는 조건’입니다 (Deleuze [1985] 1989: 29). 들뢰즈가 다른 곳에서 설명하듯, ‘영화에서 서사는 상상적인 것과 같다. 그것은 운동과 시간의 매우 간접적인 산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Deleuze 1995: 59).’”
즉 유기적 체제에서 결정체적 체제로의 서사적 변화는 이미지와 기호들, 그리고 그 관계들의 ’결과’이다. 핵심은 더 근본적인 차원, 곧 이미지들을 결합하고 관계를 만들어내는 실천(일반적으로는 몽타주)의 변화에 있습니다. 유기적 체제(고전 영화)는 세계를 단의적인 항들 안에 유지하려 했고, 도식적 이미지 연쇄를 생산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인과적 계승으로 환원했다면, 결정체적 서사는 ’방향 없음’으로 특징지어진다.
유기적 체제의 몽타주 유형:
- 행동의 원리에 기반
- 유기적 몽타주: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의 양식
- 변증법적 몽타주: 에이젠슈테인
- 이미지들과 그 간격을 통해 전체와 다른 관계를 발전
- 프랑스적, 인상주의적 숭고
- 독일적, 표현주의적 숭고
유기적 양식은 정동적 충동을 더 큰 서사적 추진력으로 흘려보내는 데 관심을 두기에 끈질기게 그 영향을 영화에 남긴다.
“영화는 언제나 이미지의 운동과 시간이 서술하게 만드는 것을 서술한다. 만약 운동이 감각운동 도식에 의해 지배된다면, 만약 그것이 상황에 반응하는 인물을 보여준다면, 당신은 이야기를 얻게 된다 (Deleuze 1995: 59).”
반면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인물이 아주 평범하든 아주 비범하든 어떤 상황에 놓였는데, 그 상황이 어떤 가능한 행동으로도 감당되지 않거나, 그가 거기에 반응할 수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너무 강력하거나, 너무 고통스럽거나, 너무 아름답다. 감각운동의 연결이 끊어진다. 그는 더 이상 감각운동적 상황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시각적이거나 청각적인 상황 안에 있다 (Deleuze 1995: 51).’”
운동-이미지가 “진화”한다면, 시간-이미지는 “일탈”한다. 이러한 진화와 일탈의 징후는 올드리치의 『키스 미 데들리』(1955), 안토니오니의 『일 그리도』(1957), 히치콕의 『사이코』(1960)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 히치콕의 과제는 “정신-이미지를 영화 안으로 도입하고, 그것을 영화의 완성, 즉 다른 모든 이미지들의 완전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들뢰즈는 로메르와 샤브롤의 논의에 크게 의지하면서, 히치콕의 영화들이 영국 분석철학 특유의 감수성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히치콕은 인물들을 ‘마비시키는’ 방식으로(『이창』의 제프리스가 가장 좋은 예시이다), 그 인물들과 관객을 ’정신-이미지를 구성하는 관계들의 사슬’로 열어 놓는다. 그리고 이것은 “행동, 지각, 정동의 실’ 과 대조된다 (Deleuze [1983] 1986: 200).” 히치콕은 사유의 능동적 원리(추리와 논증)를, 이미지가 감각운동 도식의 “사건의 지평선”을 예고하는 지점까지 밀어붙이고, 바로 그 지점에서는 사건이 더 이상 공간 속에서 실제적인 것으로 존재하지 않고, 시간 속에서 정동적이거나 가상적인 것으로 존재하게된다.
퍼스는 기호를 1차성(firstness), 2차성(secondness), 3차성(thirdness)으로 구상했는데 이는 아래와 같이 설명될 수 있다.
- 1차성: 처음 출현하는 기호. 인상주의적이고 감각적인 기호로, 정동-이미지와 연결되며 특히 얼굴의 표현(faciality)과 밀접.
- 2차성: 이 정동이 낳는 기호, 곧 지각. 여기서 정동은 몸과 뇌에 속하는 것으로 구별.
- 3차성: 몸-뇌의 행위들이 이루는 영역. 막스가 지적하듯 3차성의 기호는 단순한 행동을 넘어 정신적 관계, 판단 등을 포함.
히치콕은 3차성의 양가성, 즉 지각 속의 행동을 넘어 정신적 관계와 판단을 포함하는 특징을 가진다. 히치콕은 행동-이미지와 그 짝들을 완성하려 했지만, 그 결과 오히려 그 이미지들에 대한 “재검토”를 수행하게 되고, 그것은 내향적 접힘 혹은 반성으로서, 마침내 감각운동 도식을 “풀어헤치는” 효과를 낳게 된다(30).
들뢰즈는 시간-이미지가 전후 영화의 새로운 이미지와 기호,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들의 발달을 추적한다고 보았고, 그 타이밍을 “대략 1948년 이탈리아, 1958년쯤 프랑스, 1968년쯤 독일 (Deleuze [1983] 1986: 211)”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들뢰즈의 시간-이미지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더 나아가 현실이라는 범주 자체를 재평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적 이미지의 사실성이 우리를 현실과의 관계 속으로 끌어들인다고 주장했으나, 들뢰즈에게 이 관습은 지각을 안정적인 한계 안에 묶어 두는 것이었다. 네오리얼리즘에서는 현실이라는 범주 자체가 모호해지고, 규정된 상황들은 “어떤-공간이든(any-spaces-whatever)”으로 대체된다(폐공장, 공터, 철거 중이거나 재건축 중인 도시들 등). 객관적 확실성을 잃은 공간들에는 순수한 시각적·음향적 이미지(옵사인과 손사인)가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현대 영화는 세계를 목격하도록 강제되지만 자신이 목격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확신하지 못하는 “새로운 종의 인물들(new race of characters)”(xi)로 채워지게된다. 그들은 “불확정성 원리”(71)의 매혹 속에서 길을 잃으며, 모든 의미에서 그들은 “보는 자들(visionaries)”이 된다. 이때 서사는 감각운동 도식의 견고함(관습과 습관)으로부터 멀어지고, 배회하고 표류하며 발라드의 형식을 띄게되는 것이다. 바쟁이 『자전거 도둑』에 대해 썼듯이,
“폭우가 아버지와 아들을 마차 통로 아래로 피신하게 만들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추격을 포기한 채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 (Bazin 2005: 52).”
현대 영화는 바로 이러한 압도적인 모호성 속으로 비틀거리듯 들어가며, 그 안에서 상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은 구별 불가능해진다. 이는 들뢰즈가 『주름』에서 “모든 지각은 환각적이다(every perception is hallucinatory) (Deleuze [1988] 1993: 93)”라고 말한 지점과 맞닿아 있게 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시간-이미지는 현실/상상의 구분을 대체하며 대신 현행(Actual)/가상(Virtual)의 구분을 전면에 놓게된다 (Deleuze [1985] 1989, ch 4, 5). 가상은 들뢰즈 철학에서 가장 어려운 개념 중 하나로, 그는 내재성의 평면이 근본적으로 가상적 평면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가상은 단순한 ’가능성(possible)’이 아니다. 가상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행을 낳기 위해 끌어오는 저장고라는 의미에서 실재적(Real)이다.
“가상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이다. 그것은 사유가 현행을 산출하기 위해 길어 올리는 저장고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31).”
영화의 관점에서 이미지는 가상적 평면으로부터 현행화되는데, 역설적으로 우리가 가상을 더 분명히 보게 되는 것은 이미지가 모호해질 때이다. 현실과 상상, 과거와 현재를 구별할 수 없게 되는 지점에서 가상적인 측면이 윤곽을 드러낸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현대 영화에서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은 바로 이 구분을 흐리는 것이며, 이제 현행적인 것은 현재가 된다. 그러나 현대 영화에서의 기억의 본성은 현행과 가상, 과거와 현재의 구분을 혼동시킵니다 (32). 이에 들뢰즈는 펠리니를 인용한다.
“우리는 기억 속에서 구성된다 (Deleuze [1985] 1989: 99).”
감각운동 도식에서는 이미지가 행동으로 이어지는 인과적 회로를 만들지만, 결정체적 체제에서는 그 고리가 끊어진 채, 현재의 이미지에 설명을 덧붙여 회로를 확장하는 대신, 현재의 이미지 바로 옆에 “그 이미지의 이중”을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이것은 회상이나 꿈처럼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이미지와 동시에 붙어 있는 잠재적 과거이다. 결정체(crystal)에서 구별 불가능해지는 지점에서는,
“이미지는 현재이면서 과거여야 하고, 여전히 현재이면서 이미 과거여야 하며, 한꺼번에, 동시에 그래야 한다. …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재를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었던 현재와 함께 공존한다 (Deleuze [1985] 1989: 79).”
이 결절점(node)에서 시간은 “스크린의 표면으로 솟아오릅니다” 현재가 과거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과거가 현재로 범람하는 운동이 전면에 나오게 된다. 들뢰즈는 이 결정체적 서사 유형을 기술(description), 서술(narration), 이야기(récit)로 정교화한다.
- 기술: 대상을 지시하거나 재현하지 않고, 기술 자체가 대상을 대체한다.
- 서술: 진실성을 담보하지 않고 ‘거짓의 힘’으로서 등장한다.
- 이야기: 더 이상 참의 이념을 참조하지 않는 ‘유사-이야기’ 혹은 시뮬레이션이 된다.
현대 영화의 이 연속적 양식, 즉 유기적(운동적) 체제가 결정체적(시간적) 체제로 넘어가는 임계점은 다음 세 가지 좌표로 “영화의 영혼”과 관련해 정교화된다 (Deleuze [1983] 1986: 206).
- 주체/객체 분리에서 순수 기술로: 유기적 체제가 주체와 객체를 분리해 놓고 배경이 카메라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면, 결정체적 체제는 이미지들을 “기술(descriptions)”로서 호출한다. 이미지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기술과 사실상 동일해지며, “운동적 연장과 분리된 순수한 시각적·청각적 상황”(126)이 된다. 즉, 이미지는 행동을 위한 정보가 아니라 그 자체로 남는 지각의 덩어리가 된다.
- 현실/상상의 대립에서 현행/가상의 대립으로: 유기적 체제가 현실과 상상을 기본 축으로 삼았다면, 결정체적 체제는 그 구분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현행(Actual)과 가상(Virtual)의 대립을 도입한다. “현행은 운동적 연결로부터 절단되고, 혹은 현실은 그것의 법적 연결로부터 절단되며, 가상은 한편으로 그것의 현행화들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으로서 유효해지기 시작한다”(127). 핵심은 가상이 상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상은 현실(현행)이 생겨나는 저장고이며, 인과나 규범 같은 법적 연결에서 절단되어 그 자체로 효력을 갖는다.
- 유클리드적 공간에서 위상학적 공간으로: 유기적 체제가 유클리드적 혹은 호도롤로지적(hodological, 경로 탐색적) 공간 위에서 작동했다면, 결정체적 체제는 이상(anomalies), 불규칙, 거짓 연속으로부터 서사를 구성한다. 장면과 장면은 인과로 매끈하게 이어지지 않으며, 공간은 목표의 지도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이런 공간을 리만적, 확률적, 위상학적(topological) 공간으로 특징짓는다(127–28).
포스트모던 ’매너리즘’은 이미지가 너무 많아져서 자연이 사라질 위험, 즉 이미지가 또 다른 이미지를 참조하는 사이 바깥 세계(현실)가 기준점으로 남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여기서 자연은 이미지가 다시 세계를 믿게 해주는 바탕이자 이미지의 바깥으로서의 현실감을 의미하게 된다. 들뢰즈는 『세르주 다네에게 보내는 편지: 낙관주의, 비관주의, 그리고 여행』(Deleuze [[1986] 1995])에서 이후 세 번째 시네마적 움직임을 언급한다. 포스트모던 영화 이후 창조적 동력은 어디로 갔을까?
References
- Bazin, André (2005), What Is Cinema? II, vol. 2,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Deleuze, Gilles ([1983] 1986), Cinema 1: The Movement-Imag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 Deleuze, Gilles ([1985] 1989), Cinema 2: The Time Image, London: Athlone.
- Deleuze, Gilles ([[1986] 1995]), ‘Letter to Serge Daney: Optimism, Pessimism, and Travel’,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pp. 68–79.
- Deleuze, Gilles ([1986] 1988), Foucault,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 Deleuze, Gilles ([1988] 1993), The Fold: Leibniz and the Baroque, London: The Athlone Press.
- Deleuze, Gilles ([1989] 2001), Cinema 2: The Time-Image, Sixth Printing,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 Deleuze, Gilles (1995), Negotiations, 1972-1990,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 Foucault, Michel ([1975] 1995), Discipline and Punish: The Birth of the Prison, New York: Vintage Books.
- Kant, Immanuel (2007), Critique of Pure Reason, Revised Second Edition, London: Palgrave Macmillan.
[1] 레퍼런스 원본 찾기 실패함. 따라서 이 레퍼런스는 Flaxman을 따르고 있습니다: D. N. Rodowick, “A Genealogy of Time: The Nietzschean Dimension of French Cinema, 1958-1998,” in Premises: Invested Spaces in Visual Arts and Architecture from France, 1958-1998 (New York: Solomon R. Guggenheim Museum/Paris: Centre Georges Pompidou, 1998).
[2] Flaxman: 다만 영화 책들의 실제 전개가 항상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실제로 들뢰즈가 퍼스에 두는 관심은 어떤 순간들에서는 흔들리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퍼스는 또한 들뢰즈가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즉 시간-이미지의 영화가 발생해 나오는 ’위기’의 순간에 호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