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이미지 (3)

들뢰즈와 이미지 (3)

이하 글은 Gregory Flaxman의 The Brain Is the Screen: Deleuze and the Philosophy of Cinema (2000)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들뢰즈 철학에 대한 Flaxman의 해석을 따르고 있으며 제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페이지만 표시된 것은 Flaxman의 책을 의미합니다. 들뢰즈와 이미지 (1)들뢰즈와 이미지 (2)에서 이어집니다.


뇌는 우주의 변조와 변이 속에서 하나의 간격을 열어젖히는 이미지이다 (35).

운동-이미지에서 뇌는 사유 그 자체라기보다 사유가 끼어드는 지연으로 이해된다. 변조와 변이의 흐름 한가운데에서 생겨나는 간격은 잠깐의 멈춤이며, 그 멈춤은 생각을 밀어 올리는 듯 보이지만 결국 행위를 준비하는 기능으로 되돌아간다. 이때 지각은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전환된다 (35). 영화가 이 모델을 따를수록 사유는 행위의 명령을 더 충실히 따르게 되고, 사유는 점점 반사로 굳는다. 들뢰즈가 말하는 ’영적 자동인’은 바로 이런 회로에서 태어나는 형상이다. 생각이 스스로를 펼치기보다 자동 운동의 흐름 속으로 끌려가며,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의 충격이 있다고 하지만 충격은 발생하되 그 충격의 정동은 유도되고 전환되고 끝내 봉쇄되기 쉽다. 벤야민은 이렇게 쓴다.

우리의 술집과 대도시의 거리들, 사무실과 가구가 놓인 방들, 철도역과 공장들은 우리를 절망적으로 가둬 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영화가 와서 10분의 1초라는 다이너마이트로 이 감옥 같은 세계를 산산이 깨뜨렸고, 이제 우리는 멀리 흩어진 폐허와 파편들 한가운데에서 침착하게, 그리고 모험하듯 여행을 떠난다 (Benjamin [1935] 1969: 15).

관람의 기초는 감각운동 이미지의 체제이다. 관객은 이미지를 보고 즉시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인물의 다음 행동을 예상하며, 동일시를 통해 이야기의 흐름에 참여한다 (Deleuze [1985] 1989: 3). 문제는 이 참여가 언제나 풍부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측 가능한 행위와 반행위는 하나의 통제점이 되며, 그 통제점은 동일시를 안정시키는 대신 이미지 자체를 가난하게 만들 수 있다. 들뢰즈가 “사물 자체”를 지각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 그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무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이 늘 선택적으로 작동한다는 뜻을 겨냥한다. 우리는 전체를 보지 않고, 관심과 이해관계가 허락하는 만큼만 본다.

우리는 사물이나 이미지를 전체로서 지각하지 않고, 늘 그보다 적게 지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지각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만 지각한다. 더 정확히 말해 우리의 경제적 이해관계, 이데올로기적 신념, 심리적 요구에 비추어 지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지각한다 (Deleuze [1985] 1989: 20).

이 지점에서 들뢰즈는 영화를 재현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습관을 거부한다. 재현은 이데올로기 분석의 익숙한 출발점이지만, 들뢰즈에게 재현의 범주 자체가 영화가 공격해야 할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무엇을 옳게 보여주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옳음으로 승인되는가, 그리고 그 승인이 어떤 사유의 습관을 구축하는가의 문제로 옮겨 간다. 그래서 영화가 위조를 시작할 때, 곧 ’거짓의 힘’과 시뮬라크르의 운동과 맞물릴 때 영화는 잠재력을 실현한다. 여기서 ’거짓’은 단순한 기만이 아니라, 진리의 모델을 전제하는 재현적 질서를 흔들어 사유를 다른 리듬으로 밀어 넣는 힘이다. 그러므로 이 변화가 윤리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들뢰즈에게 윤리란 영화가 선한 메시지를 담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윤리란 영화가 관객의 사고를 어떤 틀 안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고, 그 틀이 당연한 것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방식 자체의 문제이다. 이 틀의 핵심이 감각운동 도식이다. 감각운동 도식은 보고, 반응하고, 그 반응이 다음 상황을 낳는 연쇄로 구성된다. 고전 영화의 많은 장면은 이런 구조로 정교하게 짜여 있고, 관객은 그 구조를 따라가며 ’이해 가능한 행동’과 ’정상적인 반응’을 무의식적으로 판정한다. 따라서 감각운동 도식은 단지 인지 방식이 아니라 규범을 포함하는 습관의 회로이다. 그 회로는 누가 규칙을 선언하지 않아도 우리를 훈련시키며, 정상과 비정상, 타당함과 일탈을 가르는 감각의 질서를 만든다. 들뢰즈가 말하는 ’도덕적 정상성’은 이런 서명 없는 규범이 지각과 사고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36).

이때 ‘사유의 이미지의 해방’은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긴 사유의 기본 형식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한다. 감각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연결이 아무 가치 판단도 없이 세계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일수록, 그 연결은 오히려 특정한 방식의 이해와 특정한 방식의 행동을 정상으로 만들며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들뢰즈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계주의 무관심성은 이런 이유로 정치적 중립성만큼이나 허구적이다. 권력의 축, 권력의 차원이 감지되지 않은 채 초월론적 입법이 사물의 방식 자체로 통과하도록 허용되기 때문이다 (Deleuze [1986] 1988: 68–9). 감각운동 도식의 외견적 공정성은 다르게 사유하는 모든 변칙의 발견과 기소로부터 자양분을 얻는다. 이성적 정통은 그러한 사유를 일탈로 낙인찍는다 (Deleuze [1968] 1994: 148).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이미지들, 우리의 이해를 빠져나가는 사건들은 곧바로 오류로 넘겨진다. 그리고 오류는 ‘진리’에 경의를 표함으로써 규제된 사유의 주권적 원리를 지탱한다. 따라서 감각운동 도식이 윤리적 문제인 까닭은, 그것이 단지 서사의 기술이 아니라 판단의 기계이기 때문이다. 이 도식은 보이는 것을 즉시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이해된 것을 곧바로 ‘적절한’ 반응과 결말로 연결시키면서, 세계를 하나의 정상적인 인과의 형태로 정리한다. 그러는 사이 도식은 자기 자신을 규칙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그냥” 보고 “그냥” 이해하는 방식인 것처럼 가장한다. “공간에서의 법적 연결과 시간에서의 연대기적 연결” (Deleuze [1985] 1989: 133) 속에서 감각운동 도식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각본화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미지나 사건을 만났을 때, 낯섦은 오류로 처리되고, 오류는 다시 ’진리’라는 이름을 호출해 표준적인 연결을 회복하려 한다. 이런 과정이 누적될수록 세계는 늘 이미 설명 가능한 것으로, 이미 정리된 것으로 나타나고, 도식은 그 정리된 세계 안에서 자기 자신의 서사를 자연스럽게 작성할 수 있는 위치를 얻게 된다. 이런 권력의 교활함 때문에 우리는 그 이야기를 마치 우리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들뢰즈가 빈곤과 억압을 예로 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빈곤과 억압을 못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경험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참아내고 승인하고, 내 상황과 능력과 취향을 고려하며 행동하기 위해 감각운동 도식을 동원한다. 여기서 도식은 세계를 바꾸는 실천으로 곧장 나아가기보다, 세계를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상식으로 회귀하기 쉽다.

우리는 빈곤과 억압의 강력한 조직을 보고, 또 어느 정도는 경험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인식하기 위한 감각운동 도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 그것을 참아내고 승인하기 위해, 그리고 이후에 우리의 상황, 우리의 능력, 우리의 취향을 고려하면서 행동하기 위해 감각운동 도식을 갖고 있다 (Deleuze [1985] 1989: 20).

따라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영화는 어떻게 이 회로를 강화하는 대신 끊어낼 수 있는가. 들뢰즈는 영화가 잡지나 텔레비전만큼이나 클리셰의 제작과 전파에 가담하면서도, 어떻게 클리셰들의 어두운 조직을 공격할 수 있는지 묻는다 (Deleuze [1983] 1986: 210). 여기서 클리셰는 단순한 상투어가 아니라, 사물이 감각운동적으로 정리된 이미지, 곧 사물이 즉시 이해 가능하고 즉시 반응 가능한 형태로 환원된 이미지이다 (Deleuze [1985] 1989: 20). 다시 말해 클리셰는 사유를 촉발하기보다 사유를 절약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어떤 감정과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를 미리 배치해 둔다.

이때 들뢰즈가 은유를 문제 삼는 방식이 중요해진다. 은유는 언어적 수사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은유는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말할 무언가를 제공하는 도식이며, 이미지가 너무 강력하거나 너무 부당하거나 때로 너무 아름다울 때, 우리는 이미지를 덜어내기 위해 은유를 더듬고, 이미지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래로 포섭한다 (Deleuze [1985] 1989: 18). 이 포섭이 바로 규정 판단의 운동이다. 규정 판단에서 규정의 기술은 도식에 숨겨지고, 그 도식은 한 능력이 다른 능력을 지배하도록 만드는 규칙으로 작동한다. 반대로 반성 판단은 미리 존재하는 개념을 전제하지 않는다. 한 능력이 다른 능력을 지배하는 구조도 없다. 대신 능력들 사이의 자유롭고 비규정적인 합치가 있을 뿐이며, 그 결과 규정이 숨겨 왔던 강제된 합치와 권력의 역할, 도식의 꾸며냄이 드러날 가능성이 열린다 (2008). 들뢰즈가 반성을 가독성과 연결할 때 (Deleuze 1995: 53), 그는 “보이는 것”이 “읽히는 것”이 되는 단순한 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독성이란 규정과 가시성 사이의 어긋남이 드러나는 사건이며, 그 어긋남이 새로운 비규정성, 새로운 기호의 가능성을 연다. 현대 영화가 하는 일은 바로 이 어긋남을 지속시키는 일이다. 이미지를 정보로 환원해 행동으로 연결하기보다, 이미지가 이미지로 남는 상태를 견디게 하며, 사유가 머무르고 진동할 공간을 만든다.

이 변화가 가장 날카롭게 드러나는 장면으로 들뢰즈는 『유로파 51』을 호출한다. 젊은 여성이 공장에서 나오는 노동자들을 목격하는 순간, 도식이 제공하던 정당화의 말들이 멈춘다.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사물 자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포나 아름다움이 과잉인 채로, 급진적이거나 정당화될 수 없는 성격을 가진 채로 드러난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좋든 나쁘든 ’정당화’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공장이라는 생명체가 몸을 일으키고, 우리는 더 이상 ’그래도 사람들은 일을 해야지…’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죄수들을 보는 줄 알았어. 공장은 감옥이다. 학교도 감옥이다. 은유적으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Deleuze [1985] 1989: 20).

여기서 ’문자 그대로’는 사실주의적 재현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현이 제공하던 도덕적 정상성의 프레임이 무너지고, 이미지가 정당화될 필요 없는 과잉의 성격으로 남는다는 뜻이다. 그 과잉이 공포일 수도 있고 아름다움일 수도 있으며, 그 과잉이 바로 사유를 일으키는 힘이 된다.

이 모든 참혹한 연옥의 한복판에서 들뢰즈는 현대 영화의 과업을 한 문장으로 붙잡는다. 우리의 보편적 정신분열증 속에서 우리는 이 세계를 믿을 이유들이 필요하다고 그는 쓴다 (Deleuze [1985] 1989: 172). 여기서 ’믿음’은 지식의 결핍을 메우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지식을 귀환의 매개로 지명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이다. 세계와의 연결은 설명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세계로의 연결은 믿음의 대상으로 다시 걸려야 한다 (Deleuze [1985] 1989: 172). 들뢰즈가 영화에서 찾는 것은 결국, 상식의 회로를 강화하는 또 하나의 ’정확한 이미지’가 아니라, 세계를 다시 믿게 만드는 새로운 사유의 조건이다.

References

  • Benjamin, Walter ([[1935] 1969] [1935] 1969),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in H. Arendt (ed), Illuminations, p. 26.
  • Deleuze, Gilles ([1968] 1994), Difference and Repetiti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 Deleuze, Gilles ([1983] 1986), Cinema 1: The Movement-Imag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 Deleuze, Gilles ([1985] 1989), Cinema 2: The Time Image, London: Athlone.
  • Deleuze, Gilles ([1986] 1988), Foucault,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 Deleuze, Gilles (1995), Negotiations, 1972-1990,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 Kant, Immanuel (2008), Critique of Judgement, Reissued, Oxford: Oxford Univ.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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