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이미지 (4)

들뢰즈와 이미지 (4)

이하 글은 D. N. Rodowick의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 (2005)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들뢰즈 철학에 대한 Rodowick의 해석을 따르고 있으며 제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페이지만 표시된 것은 Rodowick의 책을 의미하며 MI의 경우 시네마책1권 TI의 경우 시네마책2권을 의미합니다. 들뢰즈와 이미지 (1), 들뢰즈와 이미지 (2), 그리고 들뢰즈와 이미지 (3)에서 이어집니다.


운동에서 시간으로, 들뢰즈가 영화에서 읽는 사유의 기계

1924년은 고전 영화의 한 가지 완성으로 기억되곤 한다. 형식의 기하학이 안정되고, 시공간은 설명 가능한 논리로 정렬되며, 몽타주는 행동을 연결하는 규칙으로 정교해진다. 이 시기의 영화는 세계를 하나의 질서로 묶고, 운동을 그 질서의 기본 단위로 삼는다. 말하자면 영화는 운동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이 감각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셜록 2세」(Sherlock, Jr.)이다.

버스터 키튼이 연기한 젊은 영사기사는 랩 디졸브를 통해 자기 자신과 분리된 채, 꿈의 공간인 사각형 화면 안으로 진입한다. 이때 키튼이 한 쇼트에서 다른 쇼트로 이동하는 방식은, 운동과 행위가 거의 동일시되는 하나의 형상으로 지배된다. 포토그램이 쇼트로, 쇼트가 시퀀스로, 시퀀스가 부분들로, 부분들이 다시 운동하는 전체로 결합하는 과정은, 고전영화가 가진 운동역학의 감각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때의 영화는 마치 뉴턴 물리학의 우주처럼 움직인다. 운동은 합리적이고, 인과는 연속적이며, 시간은 운동의 계산을 위한 배경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 이 세계는 어느 순간 균열을 맞는다. 어떤 작품들에서 시간의 이미지는 더 이상 현재, 과거, 미래의 연속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이 물리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불안정한 연속체가 출현한다. 그 안에서 다음 장면을 예측하는 일은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가까워진다. 시간은 더 이상 운동에서 비롯되지 않고, 이미지로 포착되지 않는 행동과 운동은 오직 무리수적 분할, 곧 공약 불가능한 연결로만 나타난다. 고전영화가 운동의 질서로 세계를 설득했다면, 이 새 국면에서 영화는 시간의 불확정성을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에 관련된 테크놀로지를 소개한 과학은 근본적으로 근대 후기의 과학이다. 이 말은 단순히 영화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성립하기 위해 요구하는 조건들이 특정한 과학적 합리성의 문법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영화는 순간성을 필요로 한다. 노출 시간이 감소하면서 순간은 점점 더 잘게 절단되고, 그 절단이 곧 영화적 재현의 전제가 된다. 영화는 또한 순차성을 필요로 한다. 반복 가능한 공간적 상수, 예를 들면 35mm 같은 표준은 이미지들을 같은 규격 안에 놓이게 하며, 이미지의 반복 가능성을 기술적으로 안정화한다. 영화는 선형성을 필요로 한다. 영사 슬라이드 위 인접하는 등거리 이미지들은 직선적인 배열로 조직되며, 이 배열 자체가 연속성의 인상을 산출하는 토대가 된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연속성을 필요로 한다. 일정한 비율로 운동을 자동화함으로써, 운동은 임의의 순간들의 함수로 재생산된다. 일정한 비율로 운동을 자동화함으로써, 운동은 임의의 순간들의 함수로 재생산된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은 단순한 동일시가 아니다. 영화는 등거리 순간들의 체계로서 환영을 재생산하는 동시에, 그 환영을 수정할 가능성도 드러낸다. 이때 들뢰즈가 베르그송을 통해 다시 잡는 것은 쇼트, 프레임, 집합, 전체의 관계다. 쇼트는 닫힌 단위라는 측면에서 집합과 닮아 있다. 집합은 공간적이며 개별적인 부분들로 구성되고, 그래서 정적인 단면으로 파악될 수 있다. 하지만 프레임이 작동하는 방식은 집합의 닫힘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프레임의 경계는 본래 유동적이다. 경계는 대상을 공간적으로 에워싸는 동시에 쇼트를 모든 방향으로 개방한다. 그 결과 쇼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적 관계들의 연쇄 속에서 해체된다. 이 지점이 에이젠슈테인이 영화의 4차원이라 불렀던 바다와 연결된다고 로도윅은 말한다(Rodowick, 2005, p. 70).

들뢰즈는 영화의 역사나 새로운 영화 이론을 세우는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독해에는 예술사적 감각과 과학사적 감각이 함께 스며 있으며, 이는 또한 뵐플린의 예술사의 원리에서 나타난 상상적 관찰의 역사적 양식을 기준으로 스타일을 분류하는 역사관이 스며 있다. 다만 더 결정적인 참조는 과학사와 과학철학 쪽으로 확장된다. 프리고진과 스텐저스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1984)는 열린 체계가 환경과 끊임없이 정보를 교환하면서 스스로 변형하고, 동시에 환경을 변성시키는 방식에 주목한다. 이때 변화는 닫힌 체계 내부의 선형적 발전이 아니라, 교환과 불안정 속에서 발생하는 비선형적 변형으로 나타난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에서 인용한 들뢰즈가 언급하는 “빵장수의 반죽 작업” 비교는 그가 말하는 시간의 감각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정사각형을 직사각형으로 늘이고, 절반으로 접고, 다시 정사각형으로 만드는 반복에서, 처음에 찍어둔 두 점은 다음 정사각형에서 전혀 다른 관계로 놓이게 된다. 과거와 현재를 두 점이라 한다면, 새로운 구성이 형성될 때마다 두 점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변형된다. 이때 과거와 현재는 고정된 좌표가 아니라, 지속 속에서 재배치되는 관계가 된다. 시간은 이미 주어진 틀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재조직하며 새로운 것을 산출하는 과정이 된다. 이런 배경에서 들뢰즈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영화로 향한다. 영화 및 영화이론에 대한 지속적 성찰이 이미지와 사유의 관계를 어떻게 해명하는가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들뢰즈가 보는 영화는 사유의 이미지에 대응하는 것을 단순히 반영하는 매체가 아니라, 시간과 운동에 대한 사유를 시청각적으로 구성해내는 미학적 실천이고, 이에 더 나아가 바로 두뇌 자체가 되는 이미지의 평면이 된다.

기호적 질료로의 영화

메츠가 영화적 언표와 거대 통합체를 통해 내러티브 이론을 제시하면서 운동을 언어적 체계 안에서 다루려 했던 것과 달리, 들뢰즈는 영화의 구성성분을 움직이는 기호적 질료로 이해한다. 이 질료는 감각적인 것, 운동적인 것, 강도를 띠는 것, 정서적인 것, 리듬적인 것, 음조적인 것, 심지어 구어와 문어 같은 언어적 요소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것은 언어 체계가 아니다. 들뢰즈는 이를 다음처럼 정식화한다. 들뢰즈에게 영화의 이미지 구성요소들은, 언어처럼 구조화된 체계가 아니라 움직이는 ’기호적 질료(signaletic material)’를 이룬다. 이 질료는 시각과 청각 같은 감각적 특징, 운동적 특징, 강도, 정동, 리듬, 음조, 심지어 구어와 문어 같은 언어적 요소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변조 가능성을 포괄한다. 에이젠슈테인은 이를 처음에는 표의문자에 비유했고, 더 나아가 전언어 혹은 원시 언어체계에 해당하는 내적 독백에 비유했다. 그러나 언어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더라도, 이것은 언어 체계도 아니고 언어 자체도 아니다. 그것은 가소적인 덩어리이며, 기표 작용에 포섭되지 않는 비기표적(a-signifying)이고 비통사적(a-syntaxic)인 질료, 다시 말해 언어적으로 형성되지 않은 질료다 (Deleuze [1989] 2001: 29).

이때 중요한 것은 영화가 기호로 작동하되, 그 기호가 언어학적 모델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소쉬르에 연원하는 영화기호론에 거리를 두고, 퍼스의 기호학을 선호한다. 퍼스의 이론은 언어학이라기보다 논리학에 가깝고, 기호작용을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는 영화 바깥에서 언어 모델을 가져와 영화의 기호를 정의하려는 태도와 반대로, 영화 자체가 생산해온 질료에서 기호이론을 연역하려는 태도다. 이 지점에서 “이미지 실천”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테크놀로지적인 자동기계로 등장한다. 각 시대는 특정한 사유의 이미지를 생산함으로써 스스로를 사유하며, 철학은 정신기호로 주어지는 좌표를 통해 그 이미지의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된다. 이 지도는 뇌의 이미지를 함축하며, 내적 분절과 접속, 연합과 기능작용으로 구성된 하나의 사유 기계로서 영화적 실천을 읽게 만든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1991] 1994)에서 영화를 일종의 사유 기계로 다루는 맥락도 이 연장선 위에 놓인다. 질문은 이제 각 시대의 사유 전략이 무엇이며, 영화가 그것을 어떻게 구체화하는가로 이동한다. 이 흐름 속에서 발터 벤야민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의 문제를 건드린다. 「사진의 작은 역사」 ([1931] 1972: 5)는 사진의 지표성이나 도상성 자체보다, 노출을 통해 시간적 간격이 기록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노출 시간이 줄어들수록, 사진은 더 정확해지지만, 동시에 어떤 것이 증발한다고 말해진다. 환경의 아우라는 재현된 형상에 얽히는 복잡한 시간적 관계와 연결되며, 노출 시간은 이미지에서 시간과 공간의 질적 비율을 바꿔놓는다. 이 논점은 영화가 운동을 보여주기 위해 시간을 “등거리 순간들의 연속”으로 조직해왔다는 사실과 나란히 읽힐 수 있다. 시간은 기술적으로 더 정밀해질수록, 오히려 다른 종류의 시간 경험을 잃거나 변형시킨다.

들뢰즈가 시네마에 대한 분석을 하는 여행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베르그송의 관점에서 사유는 두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나는 수평축을 따라 펼쳐지는 연합의 축이며, 유사성과 인접성, 대조와 대립을 통해 이미지들을 연결한다. 다른 하나는 수직축을 가로지르는 통합과 분화의 과정이며, 연합된 이미지들이 다시 구분되고 개념적으로 묶이면서 성장하는 집합을 만든다. 이때 전체로의 운동은 질적 변화를 포함하므로, 전체는 부분들의 총합과 같지 않다. 그러나 그 전체는 다시 연결된 집합들 속에서 재총체화하며 스스로를 연장한다. 영화에서 쇼트가 시퀀스로, 시퀀스가 부분들로 통합되듯, 모든 집합은 또 다른 집합의 일부가 된다. 이러한 운동-이미지 체제에서 시간은 간격으로 환원된다. 간격은 운동과 몽타주를 위해 정의된 운동의 연결이며, 그래서 운동-이미지는 시간의 간접적 이미지만 제공한다. 들뢰즈는 고전적 재현을 지탱하는 조화로운 총체성의 이념이 이 체제에서 작동한다고 본다.

들뢰즈가 읽은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의 세가지 테제들

어떤 순간들의 연속이든 그곳에서 파생되는 운동은 환영이다 (베르그송)
운동에 대한 고대의 오류 (영원한 포즈들) 와 근대 과학의 오류 (움직이지 않는 단면들) 는 대동소이 하다 운동이 지속 또는 전체 내에서 의 변화를 표현한다.
영화는 가장 오래된 환영 (장-루이 보드리의 플라톤-기계)의 완성인가 근대 과학적 사유의 정점인가. 아니면 운동과 지속의 새로운 개념의 전조인가. 둘 다 모두 전체를 구축하고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가정 → 실재적인 운동의 여지가 사라짐 (MI, 7/17)
임의의 순간들로 묘사되는 운동에서 본래적인 것은 고대 철학의 초월적 포즈가 아니라 이 과학자들이 다루는 순간들이 다. 여기서 들뢰즈가 말하는 것은 참된 운동과 거짓 운동을 구별하는 척도가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는 지 속 내의 질적 변화를 전체와 부분들(집합들)의 관계 로 묘사한다 (68).
목적론과 총체성을 강조하는 근대 철학은 전체들을 구축함으로써 운동을 놓치는 과학의 전철을 밟는다. 자연적 지각은 불연속적 이미지들에 의존한다. 자체로는 어떤 것도 연속적인 질적 변화에 해당하는 지속에 대한 직관을 허용하지 않는다. 베르그송 방법이 지속을 심층적으로 파악하는 과정에서 자연적 지각을 초월하듯이, 시네마토그래프의 발명은 쇼트를 운동 내의 매개적 이미지로(제속의 움직이는 단면)로 제시하므로써 운동 분석을 능가한다 (68).
‘운동을 임의의 계기들과 관련시킬 때는, 어떤 계기에서도 현저하고 특이한 것 새로운 것의 생산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MI, 7/17)” (Rodowick, 2005, p. 67) 새로운 실재를 완성하기 위한 기관(organ)의 출현

몽타주는 사유의 법칙을 복원하는 장치가 되고, 에이젠슈테인의 경우 영화는 뇌의 예술, 뇌-세계의 내적 독백이 된다. 이는 운동의 종합을 통해 전체를 구성하려는 지성적 모델로 나타난다. 반대로 시간-이미지가 출현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시간과 사유의 관계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레네의 영화가 들뢰즈의 기획에서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운동-이미지의 유기적 모델이 하나의 대표를 가진다면, 시간-이미지는 결정체적 모델을 통해 다른 사유를 제시한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시간-이미지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양식이며 관습이라는 점이다. 질서의 감각을 우주에 투사하는 미학적 형식은 여전히 필요하고, 다만 그 질서의 본성이 변한다. 이 변형은 믿음의 본성이 바뀌었음을 함축한다. 들뢰즈는 시간-이미지를 모리스 블량쇼의 말을 빌려 "바깥의 사유"라 부른다. 사유하기는 사유 내부의 간격과 대면한다. 이것이 바로 사유의 힘, 곧 잠재성이다. 사유는 선동적이며 불온한 무엇이 된다. 간격은 운동과 행위의 접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열림이 되고, 이 생성의 공간인 간격에서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이 얼마든지 발생하게된다. "의미는 결코 원리나 기원이 아니다. 그것은 생산된다. 의미는 발견되거나, 되찾거나, 재도입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새로운 기계들" (LS, 72·89-90)이며, 바로 그것이 들뢰즈의 시간기계다.

이 변화는 진리에 대한 관념에도 영향을 준다. 진리는 발견되어야 할 것으로서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창조되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관념이 강해진다. 진리는 상징 체계를 전제하며, 사전에 세워진 관념을 거짓으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산출된다. 이때의 “거짓 만들기”는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진리를 생산하는 작업의 구성요소가 된다. 시간-이미지는 바로 이런 생산의 장치가 된다. 시간-이미지에서 들뢰즈가 강조하는 것은 간격이다. 간격은 총체화할 수 없는 사유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예측 불가능한 변화로서 역사를 감각하게 만든다. 자율적 간격은 사유가 자기 동일성을 확보할 자리를 제공하지 않으며, 이미지의 흐름과 사유의 운동이 이접적이며 불연속적임을 보증한다.

뮌스터버그에서 베르그송으로

영화와 주관성의 관계를 말할 때, 후고 뮌스터버그는 영화가 정신적 활동의 예술이라는 정의를 제시한다. 지각, 주의, 기억, 상상력, 감동 같은 작동이 영화 안에서 구성된다는 관점이다. 들뢰즈 역시 영화가 사유의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점에서는 이 전통과 멀지 않다. 다만 그는 그 과정에서 서구철학의 익숙한 이원론, 주체와 대상, 안과 바깥, 정신과 자연 같은 좌표를 고정시키지 않는다. 특히 베르그송과의 만남은 『운동-이미지』 ([1983] 1986)와 『시간-이미지』([1989] 2001)의 철학적 핵심을 이루며, 그 중심에는 『물질과 기억』 (1991)과 『창조적 진화』 (2023)가 놓인다. 베르그송은 근대 과학이 시간을 독립변수로 삼으려는 포부로 정의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과학이 시간을 순각적 상태의 연속으로 환원하는 방식에 회의적이다. 뉴턴 이후 운동은 질서 정연한 현상으로 간주되고, 보편상수는 측정과 무관한 자연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때 시간과 변화는 자연의 이미지에서 효과적으로 제거된다. 진보는 불변의 총체를 구성요소의 조합으로 더 정확히 기술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모델은 예기치 않은 출현과 관찰자와 지연의 상호작용, 이질적 연속체로서의 변화 같은 것을 배제한다.

이에 대해 베르그송은 시간은 창안이며,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자연은 변화와 새로운 것을 통한 지속적 복잡화이며, 전제된 모델 없이 열린 발전 과정 속에서 창조될 수 있는 총체성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이 비판하는 “시네마토그래프적 환영”은 단순히 영화 매체 비판이 아니라, 운동과 변화를 잘못 파악하는 인식의 구조를 시각화한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단면에 추상적 시간을 덧붙여 운동을 재구성하는 태도가 바로 그 환영이다. 여기서 들뢰즈의 전략은 흥미롭다. 그는 베르그송이 비판했던 시네마토그래프적 모델을 그대로 반복하는 대신, 영화가 환영을 재생산하는 동시에 환영을 수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읽는다. 쇼트는 단순한 정지 단면의 연속이 아니라, 운동의 “움직이는 단면”을 구성할 수 있고, 이 구성은 몽타주, 이동 카메라, 가동적 시점의 일반화 이후 더욱 강해진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인간의 자연적 지각과 동일한 방식으로 세계를 보여준다는 주장이 아니라, 영화가 자연적 지각의 조건을 교란하고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운동과 시간을 새롭게 사유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 맥락에서 “전체”는 단순한 상위 집합이 아니다. 오히려 전체는:

오히려 전체는, 아무리 큰 집합이라도 각각의 집합이 자족적으로 닫히지 못하게 하는 것, 각각의 집합이 더 큰 집합으로 스스로를 연장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는 집합들을 횡단하는 것, 각각의 집합들이 또 다른 집합들과 무한히 소통할 수 있는 기능성, 반드시 실현되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실과 같다. 전체는 열림이며, 내용이나 공간보다는 시간, 심지어 정신과 연관된다. 닫힌 체계는 결코 절대적으로 닫히지 않는다(MI, 16-17/29-30).

이 논점은 영화에서 쇼트와 프레임을 다시 보게 만든다. 쇼트는 닫힌 단위처럼 보이지만, 프레임의 경계는 본래 유동적이다. 경계는 대상을 공간적으로 에워싸면서도 쇼트를 모든 방향으로 개방한다. 그 결과 쇼트는 변화하는 시간적 관계들로 해체된다. 집합은 공간의 정적 단면으로 파악될 수 있지만, 전체는 끊임없는 변형으로 직관될 뿐이다. 그래서 “공간 내에서 부분들이 이전될 때마다 전체상의 질적 변화가 생긴다”는 결론이 가능해진다(MI, 8/18). 운동을 통해 전체는 대상들로 분할되고, 대상들은 전체에서 재통일되며, 그 사이에서 전체가 변화한다(MI, 11/22).

베르그송이 제시하는 운동에 대한 네 가지 테제

모든 운동은 그것이 정지 상태에서 정지 상태로의 이행인 한 절대적으로 비가시적이다 실재적(real)운동이 존재한다. 절대적으로 결정된 윤곽을 가진 독립적 물체들로 물질을 분할하는 것은 인위적인 주관적 분할이다. 현행적 운동은 사물의 전이가 아니라 상태의 전이다.
제논의 역설을 비판. 그것은 운동을 공간의 미분적 (differential) 분절들로 환원하는 인위적 분해다. 이 궤적의 형식으로 공간에 환원된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상태 또는 질의 변화로 감지될 수 있는 (연속적 이며 특이성을 띤 동시에 비가시적인) 실재 의 운동이 존재한다 우리의 필요에 호응하는 행동 과정, 어떤 것을 지각하는 탐색과 식별 과정이 생명을 유지하기위해 요구되 더라도, 이는 인위적이다.
철학적 방법으로서 의 직관은, 모든 것이 변하지만 그와 동시에 유지되는 움직이는 연속성 '움직이는 연속성'으로서의 현실감(senses of reality )을 회복하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운동과 변화의 관계는 세 가지 층위를 함축한다. 첫째는 집합들이며, 변별적 대상이나 부분들이 무리지어 있는 공간적 단면이다. 이는 순간적 이미지이자 운동의 움직이지 않는 단면이다. 둘째는 집합들 사이의 이행 운동이며, 상대적 위치를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대상과 집합들을 질적으로 변화하는 전체로 통합하고 변주한다. 셋째는 전체, 지속이며, 집합들을 가로질러 이어지면서 관계의 변형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시간적 실재다. 이 셋째 층위는 시간-이미지의 영역으로 열리며, 영화가 운동을 넘어 시간을 사유하게 만드는 자리로 기능한다(MI, 11/22). 그리고 들뢰즈가 말하는 주체성 역시 이와 닮아 있다. 우리의 주체성이 지각의 계기, 정동의 계기, 행위의 계기의 결합인 것처럼, 모든 영화는 한 가지가 지배적일지라도 이 세 종류의 이미지를 결합한다. 지각-이미지는 세계를 배치하고 선택하며, 정동-이미지는 강도와 표정의 층위에서 운동을 질과 상태로 변형시키고, 행위-이미지는 감각운동적 연쇄 속에서 결정을 조직한다. 들뢰즈는 이 이미지들의 결합 유형을 몽타주라고 부르며, 몽타주의 문제는 광의의 의미에서 기호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말한다. 영화가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조건을 구성하고, 시간의 형상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기호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에게 물질과 이미지는 차이가 없다. 인간 의식의 관점에서 몸과 몸의 필요가 물질 내에 제약을 두는 한, 이미지의 충만한 상태는 잠재적일 뿐이다. 물질이 빛과 동일하다는 것은, 물질이 이미 근본적인 나타남 또는 이미지라는 뜻이다. 대상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우리가 대상을 지각할 때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지다. 다만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이미지다(MM, 10; Rodowick, 2005, p. 74).

물질이 빛과 동일하다는 것은 첫째로 물질이 이미 근본적인 나타남(apparaitre) 또는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는 철학자들의 논쟁에서 벗어 나 좀더 상식적인 견해로 되돌아올 것을 권한다. “대상은 그 자체로 존재 한다. …… 우리가 대상을 지각할때 이는 그 자체로 그림과 같으며 그 자체로 이미지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이미지다. ...... 물질은 그것이 지각되는 대로 존재한다. 물질이 이미지로 지각되기 때문에, 정신은 그것을, 그 자체를 이미지로 파악할 수 있다." (MM, 10)

이 잠재성은 이미지의 종류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정도를 나누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첫째, 우주 전체와의 관계에서 현재의 이미지가 있다. 이것은 객관적 실재를 구성한다. 현재의 이미지는 각 지점이 다른 모든 지점에 작용하고, 받아들인 것을 전달하며, 작용과 반작용의 필연성을 조직한다(MM, 36). 모든 물질이 이미지이며, 우주는 서로 작용 반작용하는 이미지들의 전체 집합체가 된다. 둘째, 나의 몸이라는 특별한 이미지가 있다. “나는 이미지들의 집합체를 물질이라 부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미지들, 다만 나의 몸이라는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의 가능한 작용을 가리키는 이미지들을 물질에 대한 지각이라 부른다”(MM, 22).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주체성이란 몸체가 감각 운동적 관계 속에서 작용 반작용할 준비를 갖춘 것이라는 정의로 기울어진다. 그러므로 내부와 외부는 철학의 출발점이라기보다, 두 체계가 서로 얽히는 과정, 지각적 사건과 인식론적 사건에서 두 체계가 서로를 통과하는 과정에 대한 문제로 바뀐다.

이제 들뢰즈의 연역은 운동 이미지를 평면으로 정의하는 데서 시작한다. 운동 이미지를 평면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전체 집합체로서의 현재의 이미지가 보편적 변이의 세계라는 뜻이다(MI, 58/86). 들뢰즈는 이 평면을 내재성의 평면으로 부른다. 여기서 운동은 작용력이나 궤적이나 에너지 소모량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내재성의 평면은 운동 이미지와 흐르는 물질이 동일한 장이다(MI, 59/87). 흐름을 말할 때 용암이나 해류 같은 상을 붙잡는 것은 부적절하다. 운동은 진정으로 보편적 변이로 간주되어야 한다. 현재의 이미지는 분자 운동, 방사선의 전파, 열의 교환, 중력의 작용에서 파생된 이미지다. 광년 단위로 떨어진 별들의 빛과 지구 핵의 열이 동시에 만들어내는 이미지다. 이 평면 전체에는 빛의 확산이나 전파만이 존재한다. 운동 이미지에는 아직 고정된 선이나 물체가 없고, 오로지 빛의 선이나 형상들이 있을 뿐이다. 시공간 블록이 그런 형상이며,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지다. 눈은 사물들 바깥에 있지 않고, 사물들 그 자체로 빛을 내는 이미지들 속에 있다. 그래서 “사진은, 사진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물들의 바로 그 내부에서, 공간의 모든 지점에 대해서 이미 포착된 것, 이미 촬영된 것이다”(MI, 60/89)라는 문장이 성립한다.

현상학적 모델은 세계 내에서 지각하는 주체의 고정과 관련해 의식의 모델을 수립하지만(MI, 57/85),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는 자연적 지각에 대한 현상학적 모델을 거부한다. 현상학은 사물의 무중심적 상태로 역행하지 못한다. 주관적 철학으로서의 현상학이 여전히 운동을 움직이지 않는 포즈와 연관시키기 때문이다(MI, 81). 그 결과 현상학은 정신을 물질에서 분리하는 전통을 완전히 끊지 못한다. 반대로 베르그송에게는 의식이 빛이 아니다. 이미지들의 집합, 또는 빛이 곧 물질에 내재하는 의식이다. 사실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불투명성일 뿐이며, 불투명성이 없다면 빛은 원천이 드러나지 않은 채 항상 증식한다(MI, 61/90). 사물들을 비추는 광선으로서의 의식이 아니라, 주체에게로 범람하는 발광이 있을 뿐이다. 이때 지각은 두 겹의 문제로 나타난다. 한편에는 프레임화가 일어나는 시점의 고정이 있다. 시간 속에서 변화하고 견뎌나가는 몸체와 연관된 특수한 이미지의 창출이다. 다른 한편에는 물질 속 이미지가 운동 및 빛과 동일해지는 보편적 변이의 모델이 있다. 운동의 질이 중심을 출현시키고 그 중심을 물질의 흐름 속에서 용해하거나 치환한다는 점이다. 베르그송에게 의식도 두 가지로 나뉜다. 내재성의 평면에는 권리상의 의식이 있다. 잠재적이며 발광이고 평면 전체를 따라 확산된다. 반면 사실상의 의식은 평면의 특정한 지점에서 출현한다. 그것은 잠재된 이미지의 발전도 아니고, 빛나는 섬광을 통한 발견도 아니다. 사실상 의식은 빛을 투영하지도, 발전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주체성이 지각의 계기, 정동의 계기, 행위의 계기의 결합인 것처럼, 모든 영화는 비록 한 가지가 지배적일지라도 이 세 종류의 이미지를 결합한다. 들뢰즈가 이 결합 유형을 몽타주라 부르며, 몽타주의 문제가 광의의 의미에서 기호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서 분명해진다. 영화는 의미를 전달하기 전에, 의미가 생겨나는 조건을 배치한다. 영화는 세계를 재현하는 장치이기 전에, 시간과 사유의 관계가 조직되는 장치다. 그래서 운동에서 시간으로 넘어간다는 말은, 영화가 운동을 보여주다가 시간이 등장한다는 서술이 아니라, 영화가 운동을 조직하는 방식 자체가 어느 순간 간격을 자율화하며, 그 간격 속에서 시간이 직접적으로 출현하게 된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때 영화는 더 이상 운동의 질서로 세계를 설득하는 장치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사유가 발생하도록 만드는 사유의 기계가 된다. 이 글의 중심에 놓인 질문은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영화는 무엇을 보여주는가라는 질문은 종종 무엇을 의미하는가로 옮겨가지만, 들뢰즈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어떻게 시간과 사유의 관계를 구성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은 운동의 간격으로 환원되며 간접적으로 주어진다. 시간-이미지에서 시간은 직접적으로 출현하며, 사유는 총체화될 수 없는 간격과 마주한다. 이때 영화는 세계를 재현하는 장치가 아니라, 세계를 사유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영화는 시간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사유가 발생하도록 만드는 기계가 된다.

References

  • Benjamin, Walter ([1931] 1972), ‘A Short History of Photography’, Screen, Special Issue: ‘A Short History of Photography’, 13:1, pp. 5–26.
  • Bergson, Henri (1991), Matter and Memory, New York: Zone Books.
  • Bergson, Henri (2023), Creative Evolution, London New York: Routledge, Taylor & Francis Group.
  • Deleuze, Gilles ([1983] 1986), Cinema 1: The Movement-Imag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 Deleuze, Gilles ([1989] 2001), Cinema 2: The Time-Image, Sixth Printing,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 Deleuze, Gilles and Guattari, Félix ([1991] 1994), What Is Philosoph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 Prigogine, I., and Isabelle Stengers. (1984), Order Out of Chaos: Man’s New Dialogue with Nature, Toronto ; New York, N.Y: Bantam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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