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걸쳐 예술과 이론이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포스터는 이 시기를 중심으로, ‘리얼(the real)’이 더 이상 단순히 기호나 이미지로 재현되는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고, 오히려 재현을 통해 완전히 포착될 수 없는 어떤 충격적이고 원초적인 차원의 실재로 이해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전환은 특히 정신분석 이론, 그중에서도 라캉의 이론을 통해 설명된다. 라캉은 『정신분석의 네 가지 기본 개념』에서 ‘응시(gaze)’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주체가 세계를 본다는 통상적 관점과 달리, 세계가 주체를 바라보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위협적인 힘을 가리킨다. 그는 우리가 스크린 뒤에 숨어 대상을 바라본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 대상 역시 우리를 응시하고 있으며, 이때 그 응시는 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으로서 작동한다고 본다. 이때 말하는 ‘이미지 스크린(image screen)’은 단순한 시각적 장치가 아니라, 우리가 ‘보는 법’을 학습하게 해주는 문화적·시각적 코드이자, 실재의 응시에 의해 주체가 직접적으로 붕괴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일종의 완충 장치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신디 셔먼의 작업 변화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포스터는 셔먼의 작업을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응시 아래 놓인 주체’, 특히 여성 주체가 어떻게 이미지 속에서 포착되고 대상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영화 스틸을 모방한 사진, 리어 프로젝션 시리즈, 센터폴드 작업 등을 통해 구현되며, 페미니스트 시각에서 주체의 시각적 구성 과정을 비판적으로 탐구한 것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미지 스크린’ 자체에 대한 해체적 접근이 이루어진다. 셔먼은 패션 사진, 예술사 패러디, 동화 시리즈 등을 통해, 전통적 재현 체계의 허위성과 폭력성을 노출시키며, 문화적 스크린이 어떻게 이상화된 몸, 전통적 미의 기준, 예술의 권위를 만들어내는지를 과장과 패러디를 통해 드러낸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셔먼은 더 이상 스크린이라는 보호막 안에 머물지 않고, 실재의 응시 자체—즉 트라우마, 폭력, 혐오—를 노골적으로 다룬다. 신체의 훼손, 분비물, 불쾌하고 공포스러운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관람자 역시 더 이상 안정된 시각적 위치에 머물 수 없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단지 셔먼 개인의 작업 변화에 그치지 않고, 1980~90년대 전반의 시각예술에서 나타난 ‘실재의 귀환’이라는 전반적 움직임과 맞물린다.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한동안 “모든 것은 기호이자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관념을 퍼뜨렸고, 이로 인해 실제의 고통, 폭력, 불평등은 쉽게 이미지의 효과로 환원되거나 비가시화되었다. 그러나 에이즈 위기, 신자유주의의 확산,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억압 등 당대의 폭력적 현실은 그러한 기호 중심의 담론이 감당할 수 없는 차원의 ‘리얼’을 부각시켰고, 많은 예술가들은 이에 대한 반응으로 트라우마, 혐오, 파괴, 신체의 잔혹함 등을 직시하게 만드는 전략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abject)’ 개념이다.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를 ‘주체가 되기 위해 내던져야 하지만 여전히 너무 가까워 주체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시체, 분비물, 부패한 것들처럼, 몸과 분리되었지만 여전히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것들이다. 예술에서의 아브젝트는 이러한 경계의 파괴를 통해 주체-객체, 정상-비정상, 내부-외부의 이분법을 해체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항상 해방적 효과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안드레 세라노의 〈Piss Christ〉처럼, 아브젝트의 전략은 보수적 반발과 검열을 유발하며, 역설적으로 더 강력한 억압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도 작동할 수 있다. 이러한 양가성은 바타유와 브르통 사이의 역사적 논쟁과도 연결된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를 통해 숭고한 형식의 예술을 지향한 반면, 바타유는 배설물, 섹슈얼리티, 저속한 감각의 영역을 통해 예술이 다루지 못한 실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했다. 1980~90년대의 아브젝트 아트 작가들 역시 이 양극단 사이를 오가며, 어떤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처벌을 유도하거나 기존 질서를 재확인시키는 전략에 머물렀고, 다른 이들은 미학이 감당하지 못하는 지점까지 밀고 나아가려 했다. 문제는 후자의 경우조차도, 결국 그 시각적 폭력이 새로운 종류의 혐오를 재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논의의 중심에는 ‘주체’의 문제, 더 정확히 말해 ‘주체의 부재와 회귀’라는 트라우마 담론의 이중적 효과가 놓여 있다. 정신분석에서의 트라우마는, 사건이 실시간으로는 인지되지 못한 채 나중에 반복적으로 재현되면서 주체를 해체시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1990년대의 문화에서는 트라우마가 오히려 ‘진실의 증거’가 되었고, 고백적 형식 속에서 주체를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나는 피해자다”라는 선언은 반박 불가능한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며, 오히려 주체의 권위를 부활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는 1960~70년대 포스트구조주의가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던 것과는 상반되게, 1990년대에는 오히려 ‘트라우마를 증언하는 저자’의 귀환, 그것도 일종의 ‘좀비 주체’로서의 귀환을 불러온 셈이다.
결국 포스터는 이 글을 통해, 이미지와 기호가 전부라고 여겨지던 시대가 끝나고, ‘실재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al)’이라는 새로운 집착과 긴장이 예술계를 뒤흔들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응시, 이미지 스크린, 실재(트라우마), 아브젝트라는 개념들은 서로 얽히며 1980~90년대 시각예술의 급진적 변화를 이끌었고, 이 변화는 단지 미학적 실험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윤리적 쟁점과 깊이 맞물려 있었다. 예술은 더 이상 단순히 대상을 재현하는 매체가 아니라, 실재와 접촉하고, 주체를 위협하며, 때로는 그것을 다시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사회적·정치적 응답을 생산하는 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실재의 재현은 혐오의 강화나 피해자의 정체성에 대한 무비판적 강화라는 역설적 결과를 낳기도 하며, 바로 이 점에서 포스터는 이러한 예술 실천과 이론의 긴장과 모순을 면밀히 조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