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 들뢰즈 『경험주의와 주체성』의 인용 쪽수는 보운다스 영역본을 따랐고, 한국어 개념어는 한정헌·정유경 역 난장 국역본(2012)의 본문을 따랐다. 두 판이 갈릴 때 인용 문안은 보운다스를, 낱말은 국역본을 따른다.
  • 들뢰즈의 프랑스어 faire는 국역본을 따라 행위하는 것으로 옮겼다. 들뢰즈가 결론 첫머리에서 관계만으로는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 때 쓰는 낱말은 action이고(Deleuze, 1991, p. 123), 국역본은 이 낱말을 행위로 옮긴다(Deleuze, 2012, p. 248). 두 역어를 그대로 받아, 하나로 완결되는 쪽에 행위를 두고 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쪽에 행위하는 것을 두었다.
  • 합목적성(purposiveness), 의도적 합목적성(intentional purposiveness), 예정 조화(pre-established harmony)는 칸트 번역의 공인 관행을 따랐고, 수동적 종합(passive synthesis)과 수축(contraction)은 국내 들뢰즈 연구의 용례를 따랐다.

서론

1953년에 출간된 『경험주의와 주체성: 흄에 따른 인간 본성에 관한 시론』은 스물여덟 살의 질 들뢰즈가 낸 첫 단독 저작으로, 한 해 앞서 앙드레 크레송과 함께 낸 흄 소개서를 제외하면, 혼자 쓴 책으로는 이것이 처음이다. 이 책에서 흄은 들뢰즈 사유의 출발점이 되고 정초(fondation)를 이루지만, 국역본의 옮긴이들은 이 책의 들뢰즈를 경험주의자로 규정하면서도 좁은 뜻의 경험주의와는 다르다고 정리한다. 흄에서 시작한 들뢰즈의 이해는 지각에 주어진 것을 넘어서는 경험적 차원, 곧 '경험을 넘어서는 경험'을 겨눈다는 뜻에서 초월적 경험주의(empirisme transcendantal)라 부르는 것으로 이어지고, 훗날의 저작에서 강도 혹은 강도적 차이(différence d'intensité)라는 이름을 얻는다(한정헌·정유경, 2012).

흄은 정신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지각이라 부르고, 그 지각을 다시 인상과 관념으로 가른다. 주어진 것이라 불리는 이 인상과 관념의 더미에는 아직 아무 관계도 통일도 없다. 오히려 이 둘을 가르는 것은 생생함의 정도로, 기억이 개입할수록 생생함이 옅어지니 짙은 쪽이 인상이고 옅은 쪽이 관념이 된다. 관념은 언제나 그에 앞선 인상에서 나오고, 그 인상이 관념의 기원이 된다(한정헌·정유경, 2012, p. 273). 물음은 그래서 이렇게 이어진다. 원자처럼 흩어진 인상과 관념에서 어떻게 하나의 주체가 서는가. 다만 들뢰즈가 흄에게서 눈여겨보는 것은 인상이나 관념 같은 항들 자체가 아니라 관계이고, 그 관계가 항들에 외재적이라는 사실이다. 흄의 연합론을 항들의 물리적 원자론으로만 읽으면 이 외재성이 지워진다. 그래서 들뢰즈는 흄이야말로 그런 원자론적 연합론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정신의 심리학'을 '감응의 심리학'으로 대체한 인물이라고 본다(한정헌·정유경, 2012, p. 273).

구성은 두 갈래의 원리가 나눠 맡아, 근접과 유사와 인과라는 연합의 원리가 관념을 이어 인식을 이루는 한편 정념의 원리는 정신에 목적을 주어 도덕과 문화의 세계를 세운다. 이 두 원리가 함께 정신 자체를 주체로, 환상(fancy)을 인간 본성으로 만든다는 것이 책의 첫째 결론이다(Deleuze, 1991, p. 126). 그렇다면 연합이 이어 낸다는 그 인식은 무엇인가. 들뢰즈는 영어판 서문에서 흄이 믿음의 개념을 세워 인식의 자리에 놓았고, 믿음을 세속화하여 인식을 정당한 믿음으로 만들었다고 정리한다(Deleuze, 1991, p. ix). 곧 인식은 사라지지 않고 정당한 믿음의 한 갈래로 그 자리를 다시 얻는다. 들뢰즈가 제 언어로 다시 세운 정식에서 믿는다는 것은 기대하는 것이고, 하나의 관념에 그 관념이 딸린 인상의 생생함을 전해 기억과 감각을 넘어서는 일이다(Deleuze, 1991, p. 133). 그러나 주어진 인상을 넘어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리는 이 넘어섬(dépassement)에는 정당한 믿음만이 아니라 허구도 뒤섞인다. 둘을 가려낼 규칙이 뒤따라야 한다.

이 넘어섬을 밑에서 떠받치는 것이 앞서 말한 관계의 외재성이다. 들뢰즈는 이 명제를 흄에게서 길어 올려 제 철학의 주춧돌로 삼는다. 관계가 관념 자체에서 흘러나오지 않고 바깥에서 오기에, 원자적 부분들 사이를 오가는 이행과 경향이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습관은 경험을 위조하지 않고서는 경험에 호소할 수 없는 원리여서, 상상력은 우연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을 뒤섞어 믿음을 위조함으로써만 믿는다(Deleuze, 1991, p. 71). 그러니 가려내는 규칙도 습관 바깥에서 오지 않는다. 넘쳐 뻗는 확장적 규칙과 그 넘침을 되잡는 교정적 규칙이 서로 맞서면서도 습관이라는 하나의 원리에서 함께 나오고, 규칙을 비판하는 것은 언제나 다른 규칙이다(Deleuze, 1991, p. 72). 들뢰즈는 흄의 연합론이 인간 정신에 관한 이론에 그치지 않고 관계에 관한 최초의 위대한 논리를 창안함으로써, 주체가 자유로운 이행과 운동과 경향이 얽힌 복잡한 관계의 습관적 산물임을 밝혔다고 본다. 영어판 서문의 문장 그대로, 우리는 습관들, 다름 아닌 '나'라고 말하는 습관들이다(Deleuze, 1991, p. x). 그렇게 구성된 주체는 믿고 발명하는 넘어섬으로 서되 원리로 구성되는 동시에 환상에 근거를 두며(Deleuze, 1991, p. 132), 우리는 주체일 뿐 아니라 자아이기도 하고 자아는 언제나 제 기원의 노예다(Deleuze, 1991, p. 129). 인간 본성의 원리들이 서로 맞고 그 인간 본성이 다시 바깥의 자연과 맞는다는 이중의 일치가 합목적성의 물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철학은 존재하는 것의 이론이 아니라 행위하는 것(faire)의 이론으로 스스로를 세워야 한다는 마지막 문장도 이 물음에서 나온다(Deleuze, 1991, p. 133).

그러면 행위하는 것에는 무엇이 드는가. 바라보는 일은 어디까지 행위하는 것인가. 흄의 주체가 흩어진 것을 믿고 발명하며 주어진 것을 하나의 자연으로 만드는 자라면, 가장 수동적으로 보이는 응시도 그 자연을 함께 만든다. 거기까지 네 걸음을 걷는다. 합목적성이라는 이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먼저 정돈하고, 들뢰즈가 가른 두 겹의 합목적성이 어떻게 얽히는지 살핀 뒤, 그 얽힘에서 행위하는 것의 이론이 나오는 데까지 따라간다. 마지막으로 3장으로 돌아가, 들뢰즈가 미학을 힘과 가능성의 범주 아래에서 사물과 존재를 보는 과학으로 규정하고 상상력이 정념과 그 대상을 현실성에서 떼어 내 가능한 것의 양태로 되돌린다고 논하는 자리를 읽는다. 비극의 관객이 상연된 정념을 받아 반성하는 일도 거기서 나온다. 이 상상력의 일을 결론의 도식론과 나란히 놓으면, 감응을 반성하는 상상력과 기대를 낳는 응시가 한 운동임이 드러난다. 실천의 미학은 그 운동 위에 선다.

1. 목적성이라는 어긋난 이름

존 로페(Jon Roffe)의 안내서는 마지막 장에서 들뢰즈의 흄 독해 전체가 칸트의 틀 안에서 펼쳐진다고 적고, 흄의 사유를 향해 열린 이 조리개가 대상을 얼마나 일그러뜨리는지는 따지지 않겠다고 밝힌다(Roffe, 2016, p. 150). 들뢰즈의 흄이 오로지 깊이 칸트적인 대안을 내놓으려고 칸트의 흄 독해가 전제한 틀 전체를 걷어낸다는 것을 로페는 정합적 역설이라 부른다(Roffe, 2016, p. 150). 로페가 꼽는 칸트적 요소의 마지막 항은 목적성이고,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이 개념을 처음으로 제대로 전개했다고 단언한다(Roffe, 2016, p. 158). 들뢰즈는 책의 끝에 이르러서야 이 문제를 계속되는 사회적 삶의 모험과 철학의 활동에 맡기고, 문제는 거기서 풀린다. 로페는 이론 이성도 실천 이성도, 자연 개념도 자유 개념도 걸려 있지 않아 들뢰즈와 칸트가 갈라서는 듯 보인다고 쓰고, 이렇게 보이는 것을 다시 뒤집으려고 들뢰즈의 칸트 책을 끌어오므로, 흄론 한 권 안에서 이 항이 무엇을 하는지는 열린 채로 남는다.

그렇다면 목적성은 무엇을 뜻하는가. 들뢰즈의 흄 읽기 안에서 합목적성은 무엇이 목적이나 목표를 지닌다는 뜻이 아니어서, 심장의 목적이 피를 돌리는 데 있다고 말할 때의 목적론과는 반대편에 선다.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다루는 합목적성은 목적을 세운 자가 없는데도 마치 목적에 맞춰진 듯 짜인 형식을 가리키며, 첫째 서론의 정식으로는 우연적인 것 그 자체의 합법칙성이다(Kant, 2002, Ak. 20권 217쪽; Roffe, 2016, p. 158에서 재인용). 칸트는 이를 자연의 합목적성이라는 초월적 개념이라 부르고 자연 개념에도 자유 개념에도 넣지 않는다. 이 개념은 대상에 아무것도 부여하지 않고, 두루 이어진 하나의 경험을 겨누어 자연의 대상을 반성할 때 우리가 따라야 하는 유일한 길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므로 합목적성은 판단력의 주관적 원리, 곧 준칙이다(Kant, 2002, Ak. 5권 184쪽; Roffe, 2016, p. 158에서 재인용). 들뢰즈의 흄에서는 연합과 정념이라는 원리로 움직이는 인간 본성이 주어진 것을 낳는 자연의 숨은 힘과 어째서 맞아떨어지는가라는 물음이 남는다.

관념의 다발과 관념들의 연합 사이에 어떤 일치가 있는가라고 들뢰즈는 묻는다(Deleuze, 1991, p. 109). 불을 보면 열을 기대하도록 습관을 들인다 해도 그 습관이 자연의 실제 진행과 어긋나지 않으리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들뢰즈가 옮겨 적은 흄의 문장은 이 일치를 "자연의 경로와 우리 관념의 연합 사이의 일종의 예정 조화"라 부르며, 자연을 지배하는 힘이 우리에게 온전히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우리의 사유가 자연의 다른 작품들과 같은 궤도를 따라 나아가 왔다고 덧붙인다(Deleuze, 1991, p. 77). 자연과 인간 본성의 관계, 곧 주어진 것의 기원인 힘과 주어진 것 안에서 주체를 구성하는 원리 사이의 이 관계는 일치로서 사유되어야 한다. 일치가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일치의 문제가 경험주의에 참된 형이상학을 부여하고, 그 형이상학이 곧 합목적성의 문제라고 들뢰즈는 결론짓는다. 목적성이란 바로 그 문제, 곧 자연과 인간 본성 사이의 관계라는 물음에 붙은 이름이다.

영어의 nature 하나가 한국어에서 본성과 자연으로 갈라지며, 자연은 무엇에 맞세워지느냐에 따라 다시 셋으로 갈린다. 인간 본성에 맞세울 때 자연은 주어진 것을 낳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바깥의 숨은 힘이다. 주어진 것에 맞세울 때 자연은 우리가 만드는 질서다. 흄의 원자론에서 주어진 것은 흩어진 인상의 무더기여서 제 부분들을 스스로 잇지 못한다. 이 흩어진 것을 우리의 원리가 이어 놓은 총체가 곧 자연이며, 결론의 문장 그대로 우리는 믿고 발명하는 가운데 주어진 것 자체를 하나의 자연으로 만든다(Deleuze, 1991, p. 133). 문화에 맞세울 때 자연은 본능이자 필요, 인위(artifice) 이전의 즉각적인 것이다. 정의가 자연의 원리가 아니라 인위라는 흄의 논지에서 자연은 이 뜻이다. 주어진 것을 낳는 숨은 힘에는 우리의 앎이 닿지 않고, 인위 이전의 본능은 인위보다 앞서 있다. 둘 다 인간의 바깥에 놓이되 바깥에 놓이는 까닭이 서로 다르므로, 하나로 포개면 두 합목적성의 구별이 처음부터 무너진다.

2. 두 합목적성

들뢰즈가 가른 두 합목적성 가운데 인간 본성 안쪽에서 이루어지는 쪽이 이차적 합목적성이다. 관념의 연합이 정의하는 것은 인식 주체가 아니라 실천적 주체를 위한 가능한 수단의 집합이고, 이 실천적 종합에서 모든 실제적 목적은 정념과 도덕과 정치와 경제의 질서다(Deleuze, 1991, pp. 120-121). 인과 추론도 믿음도 일반 규칙도, 곧 인식의 장치 전체가 행위하고 좋은 것을 좇고 사회 속에 살기 위한 수단이다. 연합이 정념에 종속된다는 사실이 이미 인간 본성 자체에서 일종의 이차적 합목적성으로 드러나며, 이 종속이 우리를 일차적 합목적성의 문제에, 곧 인간 본성과 자연의 일치에 준비시킨다고 들뢰즈는 밝힌다(Deleuze, 1991, p. 121). 결론에서는 이렇게 전체로서 기능하는 주체의 통일을 의도적 합목적성이라 부른다(Deleuze, 1991, p. 132). 인식 주체가 실천적 주체의 한 기능이라는 이 순서가 뒤에 올 미학의 방향을 정한다. 미적으로 보는 일도 정념과 도덕의 질서 안에 놓인다.

인식이 정념의 목적에 종속된다는 말은 참으로 목적을 뜻하는가, 아니면 인식이 정념의 효과나 결과일 뿐인가. 목적이 맞다는 근거는 결론의 첫머리, 곧 행위와 관계를 잇는 끈을 보이고 행위의 본질이 수단과 목적의 관계비(rapport, nexus)에 있으며 행위한다는 것이 하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을 모으는 일이라고 규정한 대목에 있다. 하나의 원인이 수단으로 여겨지려면 그 원인이 산출하는 결과가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하고 그 결과의 관념이 무엇보다 우리 행위의 목적으로 놓여야 하며, 그런 뜻에서 수단은 원인을 초과하고 수단과 목적의 관계는 단순한 인과성이 아니라 유용성이라고 들뢰즈는 논증한다(Deleuze, 1991, pp. 124-125). 연합과 정념의 관계를 합목적성이라 부른다는 것은 그러므로 그 관계를 인과가 아니라 수단과 목적으로 읽겠다는 선언이며, 그 바닥에는 들뢰즈가 옮겨 적는 흄의 정식이 놓인다. 이성은 차갑고 초연하여 행위의 동기가 아니며, 행복을 얻고 불행을 피할 수단을 보여 줌으로써 욕구나 성향에서 받은 충동을 이끌 뿐이고, 쾌와 고통을 주는 취미가 욕망과 의욕을 처음 밀어 올리는 태엽이 된다(Deleuze, 1991, p. 125). 목적을 세우는 것은 언제나 정념이고 이성과 연합은 그 정해진 목적에 이르는 수단을 찾을 뿐 스스로 목적을 세우지 못한다. 산물이라면 정념이 먼저 있고 인식이 그 뒤에 따라 나온다. 수단이라면 순서가 뒤집혀 목적의 관념이 먼저 세워지고, 그 목적이 인식을 제 수단으로 삼는다. 수단이 원인을 넘어선다는 것이 이 뒤집힘을 가리키므로, 인식은 정념의 산물이 아니라 정념이 세운 목적에 쓰이는 수단이다.

목적을 누가 주느냐라는 물음이 이 목적을 사물 속 목적론과 가른다. 원인이 수단이 되려면 주체에게 그 결과를 선으로 여기고 거기 일치하려는 경향이 있어야 한다. 그 경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들뢰즈는 감응성의 원리의 결과이자 반성 인상과 정념 인상이라고 답한다(Deleuze, 1991, p. 125). 4장에서 들뢰즈는 모든 질서가 하나의 섭리(dessein, design)에서 나온다는 반박을 물리친다. 그 반박은 문제를 이미 풀린 것으로 전제하고 합목적성 전체를 하나의 의도로 환원하며 이성이 여러 작동 양태 가운데 하나일 뿐임을 잊는다(Deleuze, 1991, p. 77). 여기서 물리쳐지는 것은 세계 바깥에 선 무한한 지성의 의도다. 목적을 주는 것은 바깥의 지성이 아니라 주체의 정념이고, 의도라는 말을 이 글은 그렇게 읽는다. 여럿이 하나로 기능하는 것은 주체가 제 실천적 목적을 겨누기 때문이며, 목적이 주체 쪽에 있다는 이 한 가지가 이차의 성격을 정한다.

들뢰즈는 주체성을 원리의 효과라고도 부르며, 이는 연합과 정념의 관계를 인과가 아니라 수단과 목적으로 읽겠다고 앞에서 세운 선언과 부딪히는 듯 보인다. 원리가 한 가지 일만 한다고 보면 효과와 목적이 한 층위에 포개진다. 포개진 자리에서 목적은 원리가 낳은 결과에 지나지 않고, 이차적 합목적성이라는 이름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리를 두고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라는 들뢰즈의 전환을 따르면 원리는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며, 그 효과는 주어진 것 안에 발명하고 믿는 주체를 구성하는 데 있다(Deleuze, 1991, pp. 132-133). 하나의 기능은 한 번에 여러 일을 하므로, 원리는 한쪽에서 정신에 작용해 주체를 구성하고 다른 쪽에서 그렇게 구성된 주체를 조직해 인식을 정념의 목적에 종속시킨다. 효과는 주체성이 원리에 대해 무엇인지를 말하고, 목적은 인식이 정념에 대해 무엇인지를 말한다. 두 낱말은 서로 다른 것을 두고 말하므로 층위가 달라 밀어내지 않는다.

이차가 이렇게 인간 본성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기능이라면, 일차적 합목적성은 층위가 다르다. 인간 본성의 원리와 자연 자체 사이의 근원적 일치이되, 알려지지 않은 채 사유될 뿐이다. 불을 보면 열을 기대하도록 든 습관이 불이 실제로 열을 낳는 자연의 진행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 우리 안에서 연합이 짜는 순서와 바깥에서 숨은 힘이 벌이는 순서가 맞아떨어진다는 이 상정이 일차다. 결론에 앞서 4장의 신과 세계 논의에서 들뢰즈는 이미 흄의 체계 안에서 원리의 원인과 그 힘의 기원에 관해 철학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며 바로 거기가 신의 자리라고 못 박는다(Deleuze, 1991, p. 77). 연합의 원리로는 신을 세계의 원인으로 알 수 없으나 원리의 원인으로 부정적으로 사유할 수는 있으며, 꼭 그 한에서 유신론이 유효하고 목적이 다시 들어온다. 이렇게 사유된 합목적성은 무한한 지성의 기획이나 섭리이기보다 차라리 생명의 약동(élan vital)에 가깝고, 물질이자 생명이자 정신인 그 기원은 모든 대립에 무심하여 선악 너머에 있다(Deleuze, 1991, p. 77).

주체가 제 목적을 향해 하나로 기능함을 먼저 보고 나서야 그 기능하는 전체가 세계와도 맞는가를 물을 수 있다. 이차가 일차를 준비한다는 말이 이 순서를 가리킨다. 앞에서 본 의도적 합목적성이 그 하나로 기능하는 통일이고, 들뢰즈는 그것과 자연 사이의 일치를 합목적성이라 부른다(Deleuze, 1991, p. 133). 층위를 달리해 이차는 인간 본성 안쪽에서 연합이 정념에 종속되는 데서 드러나고, 일차는 인간 본성 전체와 그 바깥 자연 사이의 일치를 가리킨다. 이차는 우리가 실제로 만들고 이루는 것인 반면 일차는 만들 수 없고 다만 상정할 뿐이다. 이 경계는 뱃사람의 장면에서 눈에 보인다. 뱃사람은 돛과 키를 다루고 선원을 부려 이 모두를 항해라는 목적에 맞추며, 이 짜임은 뱃사람이 항해를 겨누고 세운 것이므로 의도적이다. 그러나 바람과 바다가 그 항해에 맞아 주는가는 뱃사람이 만들 수 없고 다만 믿고 상정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이루어지는 쪽이 이차이고 텅 빈 상정이 일차이니 이름이 뒤집힌 듯 보인다. 들뢰즈가 한정 없이 합목적성이라 적으면 거의 언제나 일차를 가리킨다고 로페는 짚는다(Roffe, 2016, p. 97). 이 글은 그 이름을 우리가 먼저 닿는 순서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맞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의 무게로 읽는다.

습관과 믿음 위에서 발명하며 하나로 기능하는 주체는 이차만으로 구성되지만, 그렇게 구성된 주체가 세계를 알기도 하는가는 증명될 수 없는 일차에 달려 있다. 자연은 존재에 준하고 인간 본성은 자연에 준한다는 이 궁극의 명제는 오직 사유될 수 있을 뿐이며,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약하고 가장 텅 빈 사유다(Deleuze, 1991, p. 133). 로페는 이 사유의 두 얼굴을 나란히 둔다. 다른 어떤 믿음에 값을 주려면 합목적성에 대한 믿음이 필요해 보이지만, 이것은 명백히 부당한 믿음이며 그런 믿음들의 극치이기까지 하다(Roffe, 2016, p. 97). 자연과 인간 본성 사이의 들어맞음이라는 관념은 경험의 근본 구조를 내놓되 정당화되지도 증명되지도 시험되지도 못한 채 광기 어린 광택으로 번득이고, 바로 그 무력하고 텅 빈 사유에서 우리는 인간 본성의 힘과 갓 태어나는 내용을 엿본다고 로페는 덧붙인다(Roffe, 2016, p. 98). 주체가 존재에 닿는다는 것은 끝내 믿음으로만 남는다.

3. 행위하는 것의 이론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 들뢰즈는 믿고 발명하는 가운데 우리가 주어진 것 자체를 하나의 자연으로 만든다고 결론짓는다. 그렇게 이룬 총체는 주어져 있지 않고, 우리가 아는 원리에 기대어 순전히 기능한다. 철학은 존재하는 것의 이론이 아니라 행위하는 것의 이론으로 스스로를 세워야 한다는 문장으로 책이 닫힌다(Deleuze, 1991, p. 133). 이 문장은 흄을 통과한 들뢰즈가 제 이름으로 내놓는 강령에 가깝다. 이 문장은 불이 정말 뜨거운지 밝히려는 학문의 선언으로 읽히기 쉬우나, 우리의 기대가 존재와 맞는가는 증명될 수 없는 일차의 물음이어서 철학은 그 물음을 제 과제에서 덜어 낸다.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닿으려 기대하고 믿고 발명하며 우리가 행위하는 것이다.

그 행위하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 순간 물음이 바뀐다. 존재하는 것의 이론이 불이 정말 뜨거운가 인과의 힘이 정말 거기 있는가를 묻는 대상 쪽 물음이라면, 행위하는 것의 이론은 흩어진 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열을 기대하고 믿고 그 기대 위에 하나의 세계를 세우는가를 묻는다. 이는 세계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발 딛는 땅을 바꾸는 일이다. 존재와의 일치는 사유될 뿐이지만 믿고 기대하고 발명하며 행위하는 것에는 우리가 아는 원리가 있고, 철학은 그 원리를 발판으로 삼는다. 이 옮김이 회의주의의 다른 이름은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으나, 흄의 회의가 남긴 것이 확인 불가능성이라면 들뢰즈의 흄은 그 불가능성을 마비로 겪는 대신 과제를 다시 나누는 일로 읽는다. 확인할 수 없는 것을 확인하려는 학문은 거기서 멈추지만, 확인 없이도 실제로 이루어지는 행위하는 것을 다루는 학문은 거기서 시작한다.

무언가를 물음에 부친다는 것은 사물을 물음에 종속시키고 붙들어, 그 강제된 종속 안에서 사물이 우리에게 어떤 본질이나 본성을 드러내게 하는 일이다. 사물은 물음이 세운 틀 아래 붙들릴 때에만 제 본성을 내놓는다. 철학 이론은 그 붙드는 물음 자체이며, 정식화된 물음의 필연적 함축을 끝까지 펼쳐 내는 일이다(Deleuze, 1991, p. 106). 강제하는 쪽에는 무엇을 드러나게 할지가 이미 목적으로 서 있고, 앞에서 목적을 주는 것이 주체의 정념이었듯 여기서 목적을 주는 것은 물음을 세우는 철학자여서, 이차의 성격이 철학의 활동에서 한 번 더 나타난다. 그러므로 물음과 물음의 비판은 하나여서 해(解, solution)에 대한 비판은 없고 오직 문제에 대한 비판만 있다(Deleuze, 1991, p. 106). 같은 자리에서 들뢰즈는 칸트 전통의 고전적 정의, 곧 경험주의는 인식이 오로지 경험에서 시작할 뿐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유래하는 내용의 이론이라는 규정을 물리친다. 경험주의에 인식은 어떤 실천적 활동을 위한 수단일 뿐이고, 흄이 세운 물음도 인식이 어떻게 성립하는가가 아니라 주체가 주어진 것 안에서 어떻게 구성되는가다(Deleuze, 1991, p. 107).

행위하는 것은 그 원리를 가지며, 존재는 오직 행위하는 것의 원리와 맺는 종합적 관계의 대상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다(Deleuze, 1991, p. 133). 로페는 이 마지막 문단이 시점을 세 번 바꾼다는 데 주목한다. 목적성은 처음에 흄 철학의 궁극점이었다가 가장 빈곤한 사유가 되고 마침내 물리쳐지는 듯 보이지만, 로페의 독해에서 목적성의 문제틀은 폐기되는 대신 실천의 이론에 딸린 이론적 보충물로 남는다. 실천의 이론과 존재의 이론은 서로 얽혀 있고, 존재하는 것의 이론은 실천적 주체의 이론이 짜인 천의 가장자리에 생긴 불규칙으로만 드러난다(Roffe, 2016, p. 143). 존재하는 것의 이론은 언제나 실천의 원리에 대한 주의와 함께 묶이므로 목적성은 곁눈으로만 보아야 한다. 목적성을 독자적 탐구 대상으로 세우는 순간 흄적 철학자는 어둠 속 유령들을 불러낸다고 로페는 경고한다. 경험주의는 초점과 프레이밍의 문제인 광학적 규율에 가까워지고, 경험주의자는 촬영 감독이 된다(Roffe, 2016, p. 144). 이 글이 로페에게서 가져가는 것은 그 초점이며, 존재는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가장자리에 남는다.

4. 상상력의 힘과 응시

반성 안에서 정념은 자신을 상상하고 상상력은 자신에게 몰입하므로 규칙이 가능해지며, 일반 규칙의 실제 정의는 상상력의 정념이라는 데 있다(Deleuze, 1991, p. 57). 상상력의 정념은 제 대상에 유효성도, 실제 대상 고유의 적응도 요구하지 않는다. 누더기를 걸쳤어도 덕은 덕이고, 비옥한 땅은 사람이 살지 않아도 우리를 그 가능한 거주자들의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Deleuze, 1991, p. 57). 취미는 상상력의 감정이지 마음의 감정이 아니며 하나의 규칙이고, 규칙은 일반적으로 힘과 그 힘의 실행 사이의 구별에 근거한다(Deleuze, 1991, p. 57). 정념과 그 대상을 반성하면서 현실성에서 떼어 내고 가능한 것의 양태로 회복하는 상상력만이 그 구별을 할 수 있다. 미학은 그리하여 사물과 존재를 힘의 범주 또는 가능성의 범주 안에서 고려하는 과학이 된다. 종신형을 받아 감옥에 갇혀 있는 미남이 미적 판단의 대상인 것은 그 신체의 활기(vigueur)와 균형(équilibre)이 현실적 실행에서 분리되어 다만 상상될 뿐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상상력이 그런 특성에 열중하기 때문이다(Deleuze, 1991, p. 57). 힘을 그 현실적 실행에서 떼어 내는 이 일을 흄은 환상의 착각이라 부르며, 상상력의 힘이란 곧 힘을 상상하는 것이다(Deleuze, 1991, p. 59).

흄이 이 논제를 더 정확하게 전개하는 자리가 비극이다. 물음은 그 자체로 불쾌감을 주는 암울한 정념의 스펙터클이 어떻게 우리를 기쁘게 하는가이며, 시인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공포에 떨게 하고 분개하게 만드는 법을 잘 알수록 우리는 더욱 더 즐거워한다(Hume, 1963, p. 221; Deleuze, 1991, p. 57에서 재인용). 정념이 비극에서 단순히 허구적이고 약화되어 있다고 말하는 퐁트넬의 논제를 흄은 물리치며, 그런 말은 해답의 한 면, 그것도 부정적이고 덜 중요한 면만 본다고 지적한다. 현실과 예술 사이에는 정도상의 차이가 없고, 정도상의 차이는 본성상의 차이의 조건일 뿐이다(Deleuze, 1991, pp. 57-58). 정념이 스스로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상상력이 동시에 정념에 열중해야 한다. 비극은 정념의 이미지를 상연하기 때문에 관객의 상상력에 정념을 제공하고, 반성된 이해가 제 편파성을 넘어서듯 반성된 정념은 제 성질을 변화시키며, 재현된 정념의 슬픔이나 음울은 상상력의 거의 무한한 유희가 가져다주는 쾌락 속에 자취를 감춘다(Deleuze, 1991, p. 58). 예술 작품은 그러므로 실제 대상의 것도 현실적 정념의 대상의 것도 아닌 그 작품에 고유한 존재의 양태를 가지며, 믿음의 정도가 낮은 것이 다른 종류의 믿음의 조건이 되어 인위적 고안물은 자신의 믿음을 가진다(Deleuze, 1991, p. 58). 미학의 경우에 정념은 연합의 원리를 통해 스스로를 반영하므로 그 원리들이 구성의 규칙을 소상히 설명해 준다(Deleuze, 1991, p. 60). 모든 종류의 구성은 명제와 추론의 계속일 뿐이라는 흄의 문장이 그 규칙을 한 줄로 보인다(Hume, 1965; Deleuze, 1991, p. 60에서 재인용).

비극의 관객은 상연된 정념을 받는다. 그렇게 받는 일이 어디까지 행위하는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들뢰즈가 먼저 밀어내는 것은 전통 형이상학의 응시다. 철학이 존재하는 것의 이론이던 동안 응시는 존재를 거울처럼 비추어 재현하는 일을 맡았다. 정신은 수동으로 남지 않고서는 자연의 원리에 의해 활성화될 수 없고 오직 그 효과를 겪을 뿐이며, 우리는 인간 본성의 원리에도 감각의 인상이 오는 곳에도 아무 힘을 갖지 못한다(Roffe, 2016, p. 116). 그런데 원리들이 그 효과를 정신 깊이 가라앉힐수록, 그 효과 자체인 주체는 점점 더 능동적이 되고 점점 덜 수동적이 된다. 원리들이 남긴 자국이자 인상인 주체는 그 인상을 쓸 수 있는 기계로 점차 바뀐다(Deleuze, 1991, pp. 112-113). 이 바뀜에서 원리의 효과가 한 겹이 아님이 드러난다. 상상력이 감응되고 고정된다는 것은 단순한 결과일 뿐이고, 여기에 복합적 결과가 더해진다. 상상력이 감응을 반성하고 감응이 정신 안에서 울려 퍼지는 일이 그것이며, 도덕의 원리와 정념의 원리가 정신에 감응을 불러올수록 정신은 하나의 환상으로 존재하기를 멈추고 스스로 고정되어 하나의 인간 본성이 된다(Deleuze, 1991, p. 59). 정념의 반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상상력이고, 일반 규칙은 정신과 상상력 안에서 울리는 감응의 반향이며 반성된 절차이자 실천의 관념이다(Deleuze, 1991, p. 59). 불과 열이 거듭 함께 오는 동안 정신은 겪기만 하지만, 이 되풀이가 습관이 되면 불을 보는 것만으로 열을 기대한다. 다만 이 능동은 자유로운 작인의 능동이 아니라 습관 체계의 능동이고, 능동적 주체란 정신에 고유한 수동성을 넘어서기 위한 복합적 수단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Roffe, 2016, p. 116).

기대는 습관이고 습관은 기대이며, 과거의 밀침과 미래를 향한 약동이라는 이 두 규정은 흄 철학의 한복판에서 같은 근본 역동성의 두 얼굴이다. 습관은 주체의 구성적 뿌리이고 주체는 제 뿌리에서 시간의 종합, 곧 미래에 비추어 현재와 과거를 종합하는 것이다(Deleuze, 1991, pp. 92-93). 아무것도 바뀌거나 발견되거나 산출하지 않은 채 반복될 뿐인 대상 대신 반복을 응시하고 반복이 새로운 인상을 산출하게 하는 정신을 고찰하면, 반복은 점진적 과정이 되고 생산이 되기까지 한다. 그 새로운 인상은 우리의 사유를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가져가고 과거를 미래로 이전시키는 결정이며, 기대이고 경향이다(Deleuze, 1991, p. 68). 응시는 받아들이기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믿음과 기대가 생산되는 곳이며, 이 대목이 뒷날의 수동적 종합과 수축으로 이어진다. 『차이와 반복』은 반복이 대상 안에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지만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어떤 것이 발생한다고 되풀이한다(Deleuze, 2004, p. 170). 같은 자리에서 상상력은 수축의 능력으로 정의되고, 그 기대와 생각은 기억에 의한 것도 지성의 작용에 의한 것도 아니며, 수축은 어떤 반성이 아니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어떤 시간의 종합을 이루어낸다(Deleuze, 2004, p. 170). 수동적이라는 말은 그래서 의식이 나서기 전에 이미 정신이 흩어진 것을 하나로 거두는 종합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응시는 행위하는 것의 바깥에 있지 않고, 가장 수동적으로 보이는 바라보는 일조차 새로운 것을 낳는 활동이며, 수동이 언제나 이미 능동이라는 경험주의의 뒤집기가 여기 있다. 낳은 것은 응시 안에 머물지 않는다. 일반 규칙의 역할은 확장적이면서 교정적이어서, 규칙은 우리가 지금 처한 정황을 잊게 만드는 가운데 감정을 교정하고 제가 태어난 정황 너머로 간다. 흄의 문장 그대로 당위의 의미는 타인의 행위에 대한 응시에서만 나오는데도 우리는 이를 우리 자신의 행위에까지 넓히지 않을 수 없다(Deleuze, 1991, p. 42). 응시가 실천이 되는 것은 그 자체로 행위여서가 아니라, 응시가 낳은 것이 규칙이 되고 그 규칙이 우리 행위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결론에서 적는 대로 주체는 기대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존하며, 본능으로든 발명으로든 주어진 것의 부분들 전체에 반응한다(Deleuze, 1991, p. 133). 주어진 것은 제 분리된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로 다시 모으지 않으며, 전체에 반응하는 일은 대상 쪽이 아니라 반응하는 정신 쪽에서 일어난다. 정황 전체에 대한 정신의 반작용과 정신 안 정념의 반영은 하나의 같은 것이고, 반작용은 생산적이며 반영은 발명이라 불린다(Deleuze, 1991, p. 130).

들뢰즈는 3장에서 상상력이 감응을 반성하고 그 감응이 정신 안에서 울려 일반 규칙이 된다고 논한다. 결론에서 달라지는 것은 그 울림이 무엇을 향하는가이며, 상상력이 하나의 감응을 반성해 규칙을 얻는다면 이제 정신은 정황과 관계의 총체에 반작용해 발명을 얻으니, 대상이 하나의 감응에서 정황의 총체로 넓어졌을 뿐 하는 일은 같다. 내포적 인식은 없으며 온갖 가능한 인식이 외연적(extensive)이고 부분들 사이의 것이다(Deleuze, 1991, p. 127). 도덕적 도식론은 더는 외연적 도식론이 아니라 내포적(intensive) 도식론이다. 거기서 정신의 활동은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알려진 관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관계로 가는 데 있지 않고, 알려진 정황과 관계의 상정된 총체에 반응하는 데 있다(Deleuze, 1991, pp. 130-131).

알려지거나 여겨진 정황과 관계에서 앞의 것은 우리를 감춰지고 알려지지 않은 것의 발견으로 이끌고, 온 정황과 관계가 우리 앞에 놓인 뒤 뒤의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전체에서 비난이나 시인의 새 감정을 느끼게 한다(Deleuze, 1991, p. 131). 인식의 대상으로서 원은 부분들의 관계, 곧 중심이라 불리는 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놓인 점들의 자리다. 미적 감정의 대상으로서 같은 도형은 정신이 제 자연적 구성에 따라 반응하는 하나의 전체로 파악된다(Deleuze, 1991, p. 131). 원의 부분을 잴 때 우리는 대상 쪽에 있는 관계를 옮겨 적을 뿐이지만, 이를 하나의 전체로 받을 때 정신은 없던 감정을 얻는다. 취미가 욕망과 의욕을 처음 밀어 올리는 태엽이라는 흄의 정식을 따르면 그 감정이 곧 행위의 동기가 된다.

맺음말

이 글은 목적성이라는 이름에서 시작했다. 로페가 들뢰즈의 흄에서 칸트적 요소의 마지막 항으로 꼽은 그 이름은 목적을 세운 자가 없는데도 목적에 맞춰진 듯 짜인 형식을 가리키는 칸트의 합목적성이었고, 미와 숭고를 다루는 책에서 나온 판단력의 준칙이었다. 들뢰즈의 흄에서 그 이름은 자연과 인간 본성 사이의 일치라는 물음에 붙는다. 그 일치는 두 겹으로 갈린다. 인간 본성 안쪽에서 연합이 정념의 목적에 종속되는 이차적 합목적성은 우리가 실제로 이루는 것이고, 그렇게 전체로 기능하는 주체와 자연 사이의 일치인 일차적 합목적성은 만들 수 없고 다만 상정할 뿐이다. 뱃사람이 돛과 키와 선원을 항해라는 목적에 맞추는 일은 이차이고, 바람과 바다가 그 항해에 맞아 주는가는 일차다. 일차가 증명될 수 없으므로 철학은 그 확인을 제 과제에서 덜어 내고 존재하는 것 대신 행위하는 것을 제 대상으로 삼는다. 목적성은 폐기되지 않고 실천의 이론에 딸린 보충물로 남아 곁눈으로만 보이며, 경험주의는 초점과 프레이밍의 문제가 되고 경험주의자는 촬영 감독이 된다. 원리들이 제 효과를 정신 깊이 가라앉힐수록 그 효과 자체인 주체는 점점 더 능동적이 되고, 습관이 곧 기대여서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 기대가 생산된다. 응시 안에서 생산된 것은 거기 머물지 않고 행위로 넘어온다. 타인의 행위에 대한 응시에서만 나오는 당위의 의미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에까지 넓히지 않을 수 없고, 그 의미가 일반 규칙이 되어 우리 행위를 규정한다(Deleuze, 1991, p. 42). 정황 전체에 대한 정신의 반작용이 곧 발명이라는 결론의 문장과 미적 감정의 대상으로서 원이 하나의 전체로 파악된다는 도식론의 예가, 그 생산을 미학의 층위에서 보인다. 흄론 한 권 안에서 목적성 항이 데려가는 곳은 미학이다. 칸트의 합목적성이 미와 숭고를 다루는 책에서 온 준칙이듯, 들뢰즈의 흄에서도 합목적성의 물음은 3장의 미학과 결론의 내포적 도식론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흩어진 주어진 것 위에서 믿고 발명하며 주어진 것 자체를 하나의 자연으로 만들고, 그렇게 만든 자연이 존재에 닿는가는 증명될 수 없는 일차의 믿음으로 남는다. 철학은 그 믿음을 확인하는 대신 믿고 기대하며 행위하는 것을 제 대상으로 삼고, 실천의 미학은 그 행위하는 것의 가장 조용한 꼴, 곧 바라보면서 이미 기대를 낳고 하나의 자연을 거두는 응시에서 만드는 자의 자리를 읽는다. 환상의 착각(illusion)이 문화의 실재라는 들뢰즈의 문장이 이 미학의 근거를 미리 말해 두었다(Deleuze, 1991, p. 62). 문화의 실재는 오성(understanding)의 눈으로는 착각이되 오성이 흩뜨릴 수 없고 흩뜨려서도 안 되는 영역에서 스스로를 내세우며, 그런 뜻에서 착각은 저를 고발하는 오성만큼이나 실재한다. 문화는 위조된 경험이면서 참된 경험(expérimentation, experiment)이며, 응시가 낳는 기대와 규칙도 이 참된 쪽에 선다. 들뢰즈가 존재하는 것의 이론을 물린 자리에 놓는 것은 회의의 침묵이 아니라 행위하는 것의 이론이다. 그 이론 안에서 응시는 재현이기를 그치고 생산이 된다.

참고문헌

  • Deleuze, G. (1991) Empiricism and Subjectivity: An Essay on Hume's Theory of Human Nature. Translated by C.V. Bounda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 Deleuze, G. (2004)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서울: 민음사.
  • Deleuze, G. (2012) 『경험주의와 주체성』. 한정헌·정유경 옮김. 서울: 난장.
  • Hume, D. (1963) 'Of Tragedy', in Essays, Moral, Political and Literary.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 Hume, D. (1965) 'Of the Standard of Taste', in MacIntyre, A. (ed.) Hume's Ethical Writings. New York: Collier Books, pp. 275-295.
  • Kant, I. (2002) Critique of the Power of Judgment. Edited by P. Guyer, translated by P. Guyer and E. Matthew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 Roffe, J. (2016) Gilles Deleuze's Empiricism and Subjectivity: A Critical Introduction and Guide.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 한정헌·정유경 (2012) 「옮긴이 후기」, Deleuze, G. 『경험주의와 주체성』. 서울: 난장, 269-278쪽.